2008 필사 시

신경림 시선집 1...91.92.93.94..95.96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 21.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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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故鄕에 와서

아내는 눈 속에 잠이 들고
밤새워 바람이 불었다
나는 전등을 켜고
머리맡의 묵은 잡지를 뒤적였다

옛친구들의 얼구을 보기가
두렵고 부끄러웠다
미닫이에 달빛이 와 어른거리면
이발소집 시계가 두 번을 쳤다

아내가 묻힌 무덤 위에 달이 밝고
멀리서 짐승이 울었다
나는 다시 전등을 끄고
홍은동 그 가파른 골목길을 생각했다


08.01.16/ 잔 2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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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 시집 [달 넘세]
1985년 창작과 비평 출간

92
씻김굿*
떠도는 원혼의 노래

편히 가라네 날더러 편히 가라네
꺾인 목 잘린 팔다리 끌고 안고
밤도 낮도 없는 저승길 천리 만리
편히 가라네 날더러 편히 가라네.

잘들라네 날더러 고이 잠들라네
보리밭 풀밭 모래밭에 엎드려
피멍든 두 눈 억겁년 뜨지 말고
잠들라네 날더러 고이 잠들라네

잡으라네 갈가리 찢긴 이 손으로
피묻은 저 손 따뜻이 잡으라네
햇빛 밝게 빛나고 새들 지저귀는
바람 다스운 새날 찾아왔으니
잡으라네 찢긴 이 손으로 잡으라네.

꺽인 목 잘린 팔다리로는 나는 못 가,
피멍든 두 눈 고이는 못 감아,
못 잡아, 이 찢긴 손을로는 못 잡아,
피묻은 저 손을 나는 못 잡아.

되돌아왔네, 피멍든 눈 부릅드고 되돌아왔네
꺾인 목 잘린 팔다리 끌고 안고
하늘에 된서리 내리라 부드득 이빨 갈면서.

이 갈가리 찢긴 손으로는 못 잡아,
피묻은 저 손 나는 못 잡아,
골목길 장바닥 공장마당 도선장에
줄기찬 먹구름 되어 되돌아왔네,
사나운 아우성 되어 되돌아왔네.

*'씻김굿'은 전라도 지방에서 많이 하는 굿으로, 원통한 넋을 위로해서 저세상으로 편히 가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08.01.16/2시 27분

93
소리
떠도는 이의 노래

너는 나를 칼날 위에 서게 한다
너는 나를 불 앞에 서게 한다
너는 나를 물 속에 뛰어들게 한다

한밤에 길을 떠나게 한다
외로운 고장 썰렁한 장바닥에서
진종일 떨며 서성거리게 한다
귀먹은 땜장이 길동무 삼아
산마을 갯마을을 떠돌게 한다

지는 해 등에 업고 긴 그림자로
꿈속에서 고향을 찾게 한다
엿도가에서 옹기전에서 달비전에서
부사귀 몽달귀 동무되어 뛰게 한다
새벽에 눈뜨고 강물소리를 듣게 한다

너는 나를 불을 두려워하게 한다
물 속에 뛰어들기를 물리치게 한다
그래서 한밤에 다시 돌아오게 한다
골방에 깊이 숨어서 떨게 한다

그러나 너는 나를 되떠나게 한다
비틀대고 절뚝거리는 이들 데불고
버려진 포구에서 썩어가는 갯벌에서
마파람 하뉘바람에 취하게 한다
너는다시 나를 칼날 위에 서게 한다

08.01.16/2시 32분

94
달 넘세*

넘어가세 넘어가세
논둑밭둑 넘어가세
드난살이* 모진설움
조롱박에 주워담고
아픔 깊어지거들랑
어깨춤 더 흥겹게
넘어가세 넘어가세
얽히고설킨 인연
명주 끊듯 끊어내고
새 세월 새 세상엔
새 인연이 있으리니
넘어가세 넘어가세
언덕 다시 넘어가세
어르고 으르는 말
귓전으로 넘겨치고
으깨지고 깨어진 손
서로 끌고 잡고 가세
넘어가세 넘어가세
크고 큰 산 넘어가세
버릴 것은 버리고
챙길 것은 챙기고
디딜 것은 디디고
밟을 것은 밟으면서
넘어가세 넘어가세
세상 끝까지 넘어가세

*'달 넘세'는 흔히 '달람새'라고도 하는데, 경북 영덕 지방에서 하는 여인네들의 놀이 '월워리청청'의 한 대목으로 손을 잡고 빙 둘러앉아 하나씩 넘어가면서 '달 넘세' 노래를 부른다. '달을 넘어가자' 는 뜻의 '달 넘새'는 어려움을 극복해가는 일을 상징한다고 말해진다.

*드난살이 - 남의 집에서 드난으로 지내는 생활
드난 - 임시로 남의 집 행랑에 붙어살면서 그 집의 일을 도와주는 고공살이. 주로 여자에게 쓰인다

고공살이 - 머슴으로나 또는 일정한 일에 고용되어 품팔이를 하는 생활. 머슴살이
멈살이 - 머슴살이의 준말


95
새벽
- 휴전선을 떠도는 혼령의 대화

보이나, 저 사람들이 보이나.
화해의 시대라고 야단들을 치는군.
배에 기름 끼면 간사한 꾀만 들지.
늙고 지쳤으니까.
암, 늙고 지쳤으니까.
우리도 이렇게 함께 앉았으니 이것이 화해인가.
서로 쏘고 찌른 상처 매만지며 함께 앉았으니까.
아닐세, 우린 서로 미워한 일 없지.
자, 떠나세, 동이 트네.
자, 떠나세 날선 낫 하나씩 들고.
자, 떠나세, 원수를 찾아서.

-이른 새벽 휴전선 부근.
경지정리로 파헤쳐진 무덤 속에서
두개골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08.01.17/ 정오 12시

96
열림굿* 노래
- 휴전선을 떠도는 혼령의 노래 1

네 뼈는 바스라져 돌이 되고
내 팔다리 으깨어져 물이 되고
이루었구나 이 나라 한복판에
크고 깊은 산과 강 이루었구나

네 살은 썩어 흙이 되고
내 피 거름되어 흙 속에 배어
피웠구나 산기슭 강가에
붉고 노란 온갖 꽃 피웠구나

내가 쏜 괴로움에 네가 찔린 아픔에
아흔하홉 고비 황천길
되돌아오기 몇만 밤이던가
울고 떠들기 몇만 날이던가

이제는 형제들 모여 붙안고 울 때
네 바스라진 머리통에 내 혀를 대고
내 깨어진 어깨에 네 입술을 대고
마음 활짝 열어제껴 통곡할 때

못나고 어리석었던 한20세월을 우는구나
우리는 갈라놓고 등져 세우고
갈가리 찢은 자들 찾아 길 나서는구나
너를 쏜 총과 나를 찌를 칼을 버릴 때

우리 몸에 붙은 더러운 먼지를 털 때
원수들에게 더럽혀진 마음을 씻을 때
이제는 울믐을 멈추고 몸에 붙은
우리들 몸에 붙은 때와 얼룩을 씻을 때

서로 찌르고 쏜 형제들 다시
아픈 상처 어루만지며 통곡하는구나
썩어 문드러진 팔다리 쓸어안고 우는구나
크고 깊은 산과 강이 따라 우는구나

붉고 노란 온갖 꽃들이 우는구나
들판을 덮은 갈대들이 우는구나
그러나 지금은 우리들 길 나설 때
원수들 찾아 눈 부릅뜨고 우는구나

08.01.17/ 낮 12시 9분
*열림굿은 여주·원성·중원 지방의 정월놀이로서, 지난 한해의 다툼과 갈림을 씻는
화해놀이였다. '열림' 은 연다는 뜻과 풍요의 뜻 둘을 함께 가지고 있었으며, 굿을 무당이
주재하지 않고 마을 젊음이들이 자유로운 형식으로 하는 것이 특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