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필사 시

신경림 시선집 1...109.110.111.112.113.114.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 21.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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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엿장수 가윗소리에 넋마저 빼앗겨

죽은 아이들이 돌아들 오는구나
비석치기* 사방치기 자치기 하면서
늦콩 열린 들길 산길을 메우고
엿장수 가윗소리에 어깨춤을 추는구나
어허 넘자 요령소리에 비칠걸음 치는구나

사라졌던 것들이 돌아들 오는구나
가시내들 삼베치마 삼승버선 입고 싣고
올곡 선뵈는 장골목을 메우는구나
엿장수 가윗소리에 덩더꿍이 뛰면서
휘모리 숨찬 가락 흥이 절로 나는구나

잃어진 것 잊혀진 것들이 돌아들 가는구나
살아 있는 것들 데불고 가는구나

도갓집 사랑, 깊은 골방에서
엿장수 가윗소리에 넋마저 빼앗겼구나
들판을 고갯길을 선창을 메우면서
가는구나 살아 있는 것들
죽은 아이들 사라진 것들 따라가는구나

08.01.22/ 밤 11시 22분

비사치기 - 돌치기 - 돌을 비석처럼 세워놓고 그것을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맞히어 넘어 뜨리는 아이들 놀이.

110
그 먼 곳

나룻배 거룻배가, 뗏목이 너벅선이*
물 따라 흘러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봇짐 등짐이, 달구지가 화물차가
배 따라 흘러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바람도 안개도 돌아오지 않았다.
빛이, 어둠이 흘러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물 따라 흘러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저자와 거리에는 빈 노래만이 떠돌았다.
가락도 뜻도 없는 노래만이 떠돌았다.
사랑은 형체를 잃어 그림자만 남고
말은 뿌리를 잃어 메아리만 흐느적댔다.
밝아지지도 어두워지지도 않는 어스름,
그 땅거미만이 땅과 물을 덮고 있었다.

새 한 마리 풀벌레 하나 울지 않았다.
해와 달, 별도 빛나지 않았다.
꽃도 피지 않고 나무도 자람이 멎었다.
낮도 맙도 아닌 어스름, 그
황혼만이 온 누리에 깔려 있었다.
산 것도 죽은 것도 흘러가서는 오지 않았다.
물 따라 흘러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08.01.22/ 밤 11시 42분
*너벅선 - 잉박선 - 너비가 넓은 배.
거룻배 -

111
강물 1

한 이례 하늘과 땅 갤 줄을 모르고
새와 벌레 서러워
울음 멈추리라 생각했다, 그이 가면
가게들 첩첩으로 문 닫아 걸고
나루에 저자에 인적 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보라, 그 화려한 꽃상여
고샅 돌아 산길 오르기도 전에
계집들 눈웃음으로 사내들을 홀리고
사내들 구전 찾기에 눈에 핏발이 섰다..

대장간에서 어물전에서 난장판에서
계집 사내 어우러져 시새우고 다투고
가다간 어깨 너머로 눈맞추는구나,
그 큰 뜻 그 바람 시들었는데도.

한밤에 깨어 강물소리를 듣는다
사람 사는 일이란 무릇 이러한 건가,
빗소리 천둥소리에 잠시 귀기울이고
꽃샘 잎샘에 잠시 목 움츠릴 뿐
도도히 흘러가는 강물 같은 건가.

08.01.22/ 밤 11시 46분

112
강물 2


피리를 잘 불어 퉁수라 불리던
내 당숙의 무덤은 공동묘지에 있다
강물은 공동묘지를 돌아 흐른다

두 길 험한 낭떠러지를 만들며
강물은 그의 딸이 사는
방 두 칸 함석집을 돌아 흐른다
마당에는 살구나무 두 구루 서 있고
살구나무 아래는 올콩이 열렸다

주인은 강 건너 고추밭엘 갔다 한다
갈미봉에 뿌옇게 비 몰려도
돌아오지 않고
큰놈만 마루에 배 깔고 숙제를 하고 있다

아낙은 깻잎을 포개며 연속극을 본다
피리를 잘 불어 퉁수라 불리던
그 애비가 잘 생각나지 않는다 한다
골마리* 깊숙이 감추어다 주던
잔칫집 부침개만이 생각난다 한다

강물은 해발 구십 미터
제일차 수몰선을 넘실대며 흐르고
연속극 속에서는 사랑놀음이 한창이다
아낙도 웃고 연필을 꼬나쥔 큰놈도 운ㅅ는다

이 집이 물에 잠겨도
잃을 것도 버릴 것도 없다 한다
보상금 받아 도회지로 나가 방을 얻고
논밭일 발뺀대서 오히려 꿈이 크다

길쌈 잘하고 수다스럽던 내 당숙모
야밤에 반봇집을 싼 제 어미도
생각나지 않는다 한다
어느 겨울 반송장으로 제 새끼 찾아왔던
그 어미가 생각나지 않는다 한다

물살에 밀려 돌이 구르듯
어차피 한평생 그렁저렁 가는 거라고
강물은 공동묘지를 돌아 흐르고
제일차 수몰선을 넘실대며 흐르고
얼룩진 한세월을 품에 안고 흐른다

08.01.22/밤 11시 56분
*골마리 - 허리춤 <전라>


113
세월

흙 속을 헤엄치는
굼을 꾸다가
자갈밭에 동댕이쳐지는
꿈을 꾸다가……

지하실 바닥 긁는
사슬소리를 듣다가
무덤 속 깊은 곳의
통곡소리를 듣다가……

창문에 어른대는
하얀 달을 보다가
하늘을 훨훨 나는
꿈을 꾸다가……

08.01.22/ 밤 11시 58분

114
강길 1

그는 나의 소학교 동창이다.
황아짐 자전거에 싣고
고갯길 강길 한 삼십리 달려가서
짐 부리고 전 벌이면 어느새 한낮이다.
철 지난 잡물건 찾는 이는 거의 없다.
이웃 책전에서 탐정소설 한 권 빌려
졸며 자며 꾸벅대면
이내 서글픈 파장이 온다.

그의 아내는 나루에 나와 그를 기다린다.
물에 잠긴 달을 보고는
홀아비 죽은 허무자귀를 외어댄다.
무당한테 미친 홀아비 빠져죽은 나루.
배가 닿으면 황아장수 짐자전거도 내리고
무당네 내외는 나란히 강길을 걸어
백촉 전등이 신상을 비추는
산 밑 외딴집으로 돌아온다.

한달이면 천리요 일년이면 만리
이것이 황아장수 걸어온 산길 강길이다.
길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돌 하나
이제 거기 찍힌 그의 발자국도 그 하나가 되었다.
그 황아장수는 나의 소학교 동창이다

이 년 후면 이 산길 강길 고갯길이
물에 잠긴다 한다.
풀도 나무도 돌도 고달픈 황아장수 발자국도
물에 잠긴다 한다.
취해 부르던 구성진 유행가 가락도
남이 알세라 주막집 여편네와의 해우채 시비도
걷잡을 수 없던 제 여편네의 바람기도 물에 잠긴다.
모두모두가 까맣게 잊혀질 것이다.

08.01.22/ 0시 6분


비사치기 - 돌치기 - 돌을 비석처럼 세워놓고 그것을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맞히어 넘어 뜨리는 아이들 놀이.

*너벅선 - 잉박선 - 너비가 넓은 배.
거룻배 -

*골마리 - 허리춤 <전라>

우리 강원도에서는 비사치기(비석치기)를 옥대까기라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확실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고향 사람을 만나면 물어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