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필사 시

편지 7 / 서시 / 객지 -고정희 시를 읽으면서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 21.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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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 시를 읽으면서


고정희 시를 읽어보면 다른 어느 시인보다도 언어를 다듬고 엮고
끼어맞추는 솜씨와 능력이 뛰어나고 탁월하다 는 알 수 있습니다.
남모르는 지독한 많은 공부가 있었던 것이지요.

시를 다 같은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현재 같이 보고 있는 신경림(전집)시인의 시는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수선화, 추수하는 아가씨]를 쓴 영국의 시인 워즈워드는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용어를 최초로 시에 도입했다고 해서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신경림 시를 보면은 우리네 옛날 일상용어가 참 많이 나옵니다.

돌확, 방아확, 같은 사물이나 황아장수, 묵도꾼 같은 말들은 지금은
용처나 용도가 없어져서 말 또한 거의 쓰지 않지만 몰라서 못쓰는
아름다운 우리말도 많이 나옵니다.
그 게 또한 장점이라면 장점일 수도 있겠지요.

서정주가 시도 잘 쓰지만 무엇보다 언어를 다루는 솜씨이 뛰어나서
그 일생 많은 결점(친일, 매국 그리고 죽을 때까지 용서나 사과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마법사라고 불리는 언어와 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에
그가 이루어 놓은 시적 업적만큼은 부정을 하지 못하고 있지요.

좋은 시나 글이 사상이나 철학이 바탕이 되지 않고 문장이나 단어만 가지고
되지는 않지만 고정희가 분노하면서 바로잡고자 애쓰고 바로 잡고 싶었던
남녀평등, 여성해방의 큰 뜻과 큰주제는 그가 남기고 간 여러 글과 시에서 넉넉히
볼 수 있습니다.
그 모두가 뉘 모를 고통 속에서 치열한 공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겠지요.
그래서 43세에 요절한 시인이 더욱 안타깝기도 합니다.




ㅡ편지 7


솔바람이 되고 싶은 날이 있지요
무한천공 허공에 홀로 떠서
허공의 빛깔로 비산비야 떠돌다가
협곡의 바위틈에 잠들기도 하고
들국 위의 햇살에 섞이기도 하고
낙락장송 그늘에서 휘파람을 불다가
시골 학교 운동회날, 만국기 흔드는 선들바람이거나
원귀들 호리는 거문고 가락이 되어
시월 향제 들판에 흘렀으면 하지요

장작불이 되고 싶은 날이 있지요
아득한 길목의 실개천이 되었다가
눈부신 슬픔의 강물도 되었다가
저승 같은 추위가 온 땅에 넘치는 날
얼음장 밑으로 흘러들어가
어둡고 외로운 당신 가슴에

한 삼백 년 꺼지잖을 불꽃으로 피었다가
사랑의 '사리'로 죽었으면 하지요




서시 / 고정희


제 삶의 무게 지고 산을 오른다.
더는 오를 수 없는 봉우리에 주저 앉아
철철 샘 솟는 땀을 씻으면, 거기
내 삶의 무게 받아
능선에 푸르게 걸어 주네, 산

이승의 서러움 지고 산을 오르다.
열두 봉 솟아 있는 서러움에 기대어
제 키만한 서러움 벗으면, 거기
내 서러움 짐 받아
열두 계곡 맑은 물로 흩어 주네, 산산

쓸쓸한 나날들 지고 산에 오르다.
산꽃 들꽃 어지러운 능선과 마주쳐
네 생애만한 쓸쓸함 묻으면, 거기
내 쓸쓸한 짐 받아
부드럽고 융융한 품 만들어 주네, 산산산

저 역사의 물레에 혁명의 길을 잣듯
사람은 손잡아 서로 사랑의 길을 잣는 것일까
다시 넘어가야 할 산길에 서서
뼛속까지 사무치는 그대 생각에 울면, 거기

내 사랑의 눈물 받아
눈부신 철쭉꽃밭 열어 주네, 산,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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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삶의 무게 지고 산을 오르고
이승의 서러움 지고 산을 오르고
쓸쓸한 나날들 지고 산에 오르고


고정희는 사물을 그다지 낙관적으로 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 결혼을 했더라면 속물이 되어 갈지라도 안정적인 글을 썼을까요.
사람은 누구나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요.
무거운 짐 내려 놓으면 가볍기는 하겠지만 죽음이 짐을 부려놓는 것은 아니지요.

이 세상 버겁지 않은 삶이 어디 있으리오만 무거운 짐을 혼자만 지고 가기에는
좁은 어깨가 너무 견디지 힘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객지 /고정희


어머님과 호박국이 그리운 날이면
버릇처럼 한 선배님을 찾아가곤 했었지.

기름기 없고 푸석한 내 몰골이
그 집의 유리창에 어른대곤 했는데,
예쁘지 못한 나는
이쁘게 단장된 그분의 방에 앉아
거실과 부엌과 이층가 대문 쪽으로
분주하게 오가는 그분의 옆얼굴을 훔쳐보거나
가끔 복도에 낭낭하게 울리는
그 가족들의 윤기 흐르는 웃음 소리,
유독 굳건한 혈연으로 뭉쳐진 듯한
그 가족들이 아름다움에 밀려
초라하게 풀이 죽곤 했는데,

그분이 배려해 준
영양분 가득한 밥상을 대하면서
속으로 가만가만 젖곤 했는데,
파출부도 돌아간 후에
그 집의 대문을 쾅, 닫고 언덕을 내려올 땐
이유 없이 쏟아지던 눈물.

혼자서 건너는 융융한 삼십대.



괄게 보이고 강해 보여도 내면의 나약함이 배여드는 것은 여자여서가 아니라
감정을 가진 인간이기에 때로는 이유없이 눈물도 쏟아지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