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필사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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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 21.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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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강길 2


새참이 지났는데도 장이 서지 않는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버스가 멎고
고추부대 몇자루가 내려와도
사람들은 고샅에 모여 해장집 의자에 앉아
더 오르리라는 수몰보상금 소문에
아침부터 들떠 있다
농협창고에 흰 페인트로 굵게 그어진
1972년의 침수선 표시는 이제 아무런 뜻도 없다
한 반백년쯤 전에 내 아버지들이 주머니칼로 새겼을
선생님들의 별명 또는 이웃 계집애들의 이름이
헌 티처럼 붙어 있는 플라타너스 나무들만이
다시는 못 볼 하늘을 향해 울고 있다
학교로 올라오는 물에 잠길 강길을 굽어보며
학교 마당을 좁게 메운 채 울고 있다


08.01.22/ 0시 9분

116
진도의 무당
진도에서

자정께 시작된 굿은
동이 터도 끝나지 않는다
혼일랑 아예 원혼의 길잡이로
멀리 구천으로 나들이를 보내고
무당은 육신만 남아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고 있다

바람을 쐬며 주먹만한 새벽별을 보다가
나는 그 별들 사이에 끼여 있는
무당의 혼을 찾아낸다
무당의 혼을 따라 우리들의 혼도
거기 가 끼여
이 외진 섬마을의 신명나는 굿판을
구경하고 있는 것을 본다

08.01.23/ 아침 9시 27분


117
실상사의 돌장승
지리산에서

지리산 산자락
허름한 민박집에 한 나달* 묵는 동안
나는 살상사의
돌장승과 동무가 되었다
그는 하늘에 날아올라가
노래의 별을 따다주기도 하고
물 속에 속꽂이해 들어가
애기의 조약돌을 주워다주기도 했다.

헐렁한 벙거지에 통방울눈을 하고
삼십년 전에 죽은
내 삼촌과 짝이 되어
덧뵈기춤을 추기도 했다.
어름산이 시늉으로 다리를 떨며
자벌레처럼 몸을 틀기도 했다.

왜 나는 몰랐을까
그가 누구인가를 몰랐을까.
문득 깨닫고 잠에서 깨어나 달려가보니
실상사 그 돌장승이 섰던 자리에는
삼촌과 그의 친구들만이
통방울눈에 눈물을 그득 담고 서서
지리산 온 산에 깔린 열나흘 달빛에
노래와 애기의
은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08.01.23/아침 9시 43분
*나달- 나흘이나 닷새 가량.
사날 - 사흘이나 나흘. 사나흘. 삼사일
덧뵈기춤 - 덧보기춤 - <춤> 탈을 쓰고 농악장단에 맞춰 추는 춤. 남사당 놀음, 야유
오광대 놀음 등에서 쓴다.






118
주천강가의 마애불
주천에서

다들 잠이 든 한밤중이면
몸 비틀어 바위에서 빠져나와
차디찬 강물에
손을 담가보기도 하고
뻘겋게 머리가 까뭉개져
앓는 소리를 내는 앞산을 보며
천년 긴 세월을 되씹기도 한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논틀밭틀에*
깊드리에 흘린 이들의 피는 아직 선명한데.
성큼성큼 주천 장터로 들어서 보면
짓눌리고 밟히는 삶 속에서도
사람들은 숨가쁘게 사랑을 하고
들뜬 기쁨에 소리지르고
뒤엉켜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참으려도 절로 웃음이 나와
애들처럼 병신 걸음 곰배팔이 걸음으로 돌아오는 새벽
별들은 점잖지 못하다.
하늘에 들어가 숨고
숨 헐떡이며 바위에 서둘러 들어가 끼여앉은
내 얼굴에서는
장난스러운 웃음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08.01.23/오후 1시 44분
*논틀. 논틀길 - 꼬불꼬불 논두렁으로 난 좁은 길./ 준말 논틀
*깊드리 - 바닥이 깊은 논.


119
아우라지 뱃사공


아우라지* 뱃사공
정선에서

산과 물이 지겨워 아우라지 뱃사공 아내는
세 아들딸을 두고 대처로 떠났다.
아우라지 뱃사공은 물이 싫다.
산과 물을 좋아하는 대처 사람이 싫다.
종일 배를 건너 손에 쥐는
천원 안팎의 돈 그것이 싫다.
세상이란 잘난 사람들끼리 그저
잘난 놀음으로 돌아치는 곳.
그를 가엾다고 말하는 세상 사람들이 그는 싫다.
딸애는 바람막이도 없는 난달에서*
구호미를 삶아 저녁밥을 짓고
아들놈은 단칸 셋방 맨방닥에 엎드려
몽당연필로 제 어미에게 편지를 쓴다.
보낼 수도 없는 서러운 편지를.
아우라지 뱃사공은 그들을 보는 세상의 눈이 싫다.
정선아라리의 구성진 가락이 싫다.

08.01.23/ 오후 5시 0분
*난달 - 길이 이리저리 터진 넓은 곳.


120
폐항
즐포에서

멀리 뻗어나간 갯벌에서
어부 둘이 걸어오고 있다
부서진 배 뒤로 저녁놀이 빨갛다
갈대밭 위로 가마귀가 난다

오늘도 고향을 떠나는 집이 다섯
서류를 만들면서
늙은 대서사는 서글프다
거리엔 찬바람만이 불고 이젠
고기 비린내도 없다

떠나고 버려지고 잃어지고……
그 희뿌연 폐항 위로
가마귀가 난다
08.01.23/ 오후 5시 0분


08.01.23/ 오후 5시 2분



*나달- 나흘이나 닷새 가량.
사날 - 사흘이나 나흘. 사나흘. 삼사일
덧뵈기춤 - 덧보기춤 - <춤> 탈을 쓰고 농악장단에 맞춰 추는 춤. 남사당 놀음, 야유
오광대 놀음 등에서 쓴다.



*논틀. 논틀길 - 꼬불꼬불 논두렁으로 난 좁은 길./ 준말 논틀
*깊드리 - 바닥이 깊은 논.


*난달 - 길이 이리저리 터진 넓은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