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필사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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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 21.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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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폐항
즐포에서

멀리 뻗어나간 갯벌에서
어부 둘이 걸어오고 있다
부서진 배 뒤로 저녁놀이 빨갛다
갈대밭 위로 가마귀가 난다

오늘도 고향을 떠나는 집이 다섯
서류를 만들면서
늙은 대서사는 서글프다
거리엔 찬바람만이 불고 이젠
고기 비린내도 없다

떠나고 버려지고 잃어지고……
그 희뿌연 폐항 위로
가마귀가 난다


08.01.23/ 오후 5시 2분

121
남한강의 어부
청풍에서

매일 조금씩 물에 밀리다가
마침내 산중허리까지 쫓겨올라와서
움막을 쳤다

밤마다 바다처럼 넓어진 강에 나가
주낙을 치지만
건져올리는 건
잉어도 눈치도 메기도 아니다

달려올라오는 건
이 고장 사람들의 깨어지고 찢어진
꿈의 조각들뿐이다

잘난 사람들 서울사람들한데
밟혀서 짓뭉개진
꿈의 조각들뿐이다


08.01.23/ 오후 5시 4분

122


친구들을 따라 몇번 디스코홀엘 간 일이 있다. 그때마다 나는 홀을 가득 채운 뜨거운 열기에 압도당했다. 이 엄청난 힘의 저장에 따로 흥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얼마 뒤 나는 보았다. 이 열기, 이 힘을 조작하는 사내가 있음을. 한 사람 한 사람의 손과 발에 매인 끈을 조작하는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끈에 매인 모든 사람들이 울고 웃고 들떠서 날뛸 때 그의 얼굴에 어린 것은 오직 쓴웃음이었다.
퇴근길 버스에서 또는 늦은 잠자리에서 나는 생각한다. 우리들의 손발에 매인 이 끈을 조작하는 그 추악한 사나이는 누구인가. 아니, 우리들의 손발에서 이 질긴 끈이 끊어질 그날은 영 없을 것인가.

08.0123/ 오후 5시 8분

123
늙은 악사


처음 그를 본 것은 황강 장터였다.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던데 벌여진 장바닥 한모둥이에서 그는 기타를 치고, 윗입술에 커다란 사마귀가 달린 처녀애가 약을 팔았다. 다음 글 본 것은 중앙선 밤차속에서였다. 어느 승객의 트랜지스터에서는 질 낮은 코미디언의 객담과 함께 흘러간 노래가 빽빽대는데, 그는 기타통에 턱을 괴고 반즘 잠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가 슬펐다.
얼마 뒤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에서였다. 누군가 뒤따르는 기척이 있어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몇 발자국 떼어놓다가 다시 뒤돌아보았다. 보일 듯 말 듯 먼발치에 그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달려갔지만 그는 슬그머니 모습을 감추었다. 그뒤 그는 매일밤처럼 나를 뒤따랐고, 돌아보면 보일 듯 말 듯 먼발치에 서 있다가 슬그머니 살아졌다. 나는 그가 두려웟웠다.
어느덧 그는 곳곳에서 내 앞에 나타나게 되었다. 버스에서 찻집에서 바둑집에서 그는 보일 듯 말 듯 내 앞에 나타났다가 아는 체 할라치면 슬그머니 사라졌다. 마침내 나는 내가 그와 함께 살고 있음을 알았으며 내가 그로부터 헤어날 수 없을을 알았다. 내 몸짓 손짓 그 하나하나가 그에 의해 조종되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그가 미웠다.
그러나 어느날 나는 문득 나 자신이 시골 장바닥에서 기타를 치며 약을 파는 몸이 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갑자기 눈을 떠보면 밤늦은 차창에 이마를 대고 잠이 들어 있기도 했다. 또는 그 누군가를 보일 듯 말 듯 먼발치에서 뒤쫓고, 그 몸짓 손짓 하나하나를 음흉하게 조종하기도 하고, 이른 새벽 찾아가 슬그머니 창 너머로 들여다보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어느새 내가 그 늙은 악사가 되어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가엾었다.

08.0102/밤 11시 24분

124


새카만 어둠속에서 서서히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 머리에 인 광주리의 윤곽이 나타나고, 얼굴의 선이 드러나고, 목 어깨 몸통이 드러나더니, 마침내 어둠을 배경으로 생선 광주리를 인 젊은 아낙네가 거기 서 있었다.
아직도 끈적끈적하고 진한 어둠이 우리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아낙네는 무슨 말을 하는 듯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고, 그의 말은 어둠을 헤엄치면서 천천히 나를 향해 오고 있었다.
아, 마침내 그의 말이 내게 이르렀다. 그러나 이미 그때 그 여자의 모습은 서서히 어둠속에 되묻히고 있었다. 몸통이 묻히고, 목 어깨의 형상이 l사라지고, 끝내는 얼굴의 윤곽이, 머리 위에 얹혔던 광주리가 어둠과 하나가 되었다.

내 형상도 지금 서서히 어둠속에서 드러나고 있다. 얼굴과 목과 어깨의 선이 드러나고 팔다리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당신을 향해서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나의 말은 어둠속을 헤엄치면서 천천히 당신을 향해 갈 것이다. 아, 그러나 나으 말이 당신에게 이르렀을 때, 이미 내 형상은 어둠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을 것이다.

08.01.23/ 밤 11시 30분


125
고향길


아무도 찾지 않으려네
내 살던 집 툇마루에 앉으면
벽에는 아직도 쥐오줌 얼룩져 있으리
담 너머로 늙은 수유나무잎 날리거든
두레박으로 우물물 한모금 떠 마시고
가윗소리 요란한 엿장수 되어
고추잠자리 새빨간 노을길 서성이려네
감석* 깔린 장길은 피하려네
내 좋아하던 고무신집 딸아이가
수틀 끼고 앉았던 가겟방도 피하려네
두엄더미 수북한 쇠전마당을
금줄기 찾은 허망한 금전꾼 되어
초저녁 하얀 달 보며 거닐려네
장국밥으로 깊은 허기 채우고
읍내로 가는 버스에 오르려네
쫓기듯 도망치듯 살아온 이에게만
삶은 때로 애닮기도 하리
긴 능선 검은 하늘에 박힌 별 보며
길 잘못 든 나그네 되어 떠나려네


08.0102/ 밤 11시 39분
*감석 - 감돌<광>유용한 광물을 일정한 정도 이상으로 지닌 광석.
버력 - 광석이나 석탄을 캘 때 나오는, 광물 성분이 섞이지 않는 잡돌.


126
귀향일기초

1

신작로 뽀얀 먼지길에
새빨간 고추잠자리떼가 날고 있다.

날 따라 외지로 떠난 걸로 알았던
우리들 삶과 사랑의 애기가
술도가 뒤뜰에 가겟방 판대기 의자에
엉겨서 도란대는 것을 보고
문득 놀란다.


2

별정우체국도 단위농협 창고도
부서진 채 굳게 문이 잠겨 있다.
내년이면 물이 차리라 한다.
이곳 모두가 허허바다가 된다.

우리들 삶과 사랑의 애길 들어줄 이
이제 아무도 없으려나.
검은 바위와 늙은 나무에 무딘 칼로 새겨진
우리들 누님들의 투박한 이름
보아주는 이 오직 늙은 용왕뿐이려나.

08.0123/밤 11시 43분


*감석 - 감돌<광>유용한 광물을 일정한 정도 이상으로 지닌 광석.
버력 - 광석이나 석탄을 캘 때 나오는, 광물 성분이 섞이지 않는 잡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