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필사 시

신경림 시선집 1...127.128.129.130.131.132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 21.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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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편지

시골에 있는 숙에게

신새벽에* 일어나
비린내 역한 장바닥을 걸었다.
생선장수 아주머니한테
동태 두 마리 사 들고
목롯집에서 새벽 장꾼들과 어울려
뜨거운 해장국을 마셨다.

거기서 나는 보았구나
장바닥에 밴 끈끈한 삶을,
살을 맞비비며 사는
그 넉넉함을,
세상를 밀고 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생각느니보다 삶은
더 크고 넓은 것일까.
더 억세고 질긴 것일까.
네가 보낸 편지를
주머니 속으로 만지면서
손에 든 두 마리 동태가
떨어져나갈 때까지
숙아, 나는 걷고 또 걸었구나.
크고 밝은 새해의 아침해와
골목 어귀에서 마주칠 때까지
걷고 또 걸었구나.

08.01.23/ 밤 11시 48분
*신새벽 어둑새벽 날이 밝기 어두운 새벽녁


128
세밑

흔들리는 버스 속에서 뒤돌아본다.
푸섶길의 가없음을 배우고
저녁노을의 아름다움을 배우고
새소리의 기쁨을 비로소 안 한 해를.
비탈길을 터벅거리며 뒤돌아본다.
저물녘 내게 몰아쳐온 이 바람,
무엇인가, 송두리째 나를 흔들어놓는
이 폭풍 이 비바람은 무엇인가,
눈도 귀도 멀게 하는, 해도 달도
멎게 만드는 이것은 무엇인가.
자리에 누워 뒤돌아본다.
만나는 일의 설레임을 알고
마주 보는 일의 뜨거움을 알고
헤어지는 일의 아픔을 처음 안 한 해를.
꿈속에서 다시 뒤돌아본다.
삶의 뜻을 또 새로 본 이 한 해를.

08.01.23/밤 11시 55분

129
가을에

내게는 작은 꽃밖에 없다
가난한 노래밖에 없다
이 가을에 네게 줄 수 있는
지친 한숨밖에 없다

강물을 가 들여다보아도
달도 별도 보이지 않는구나
갈대를 스치는
빈 바람뿐이로구나
몰려오는 먹구름뿐이로군

내게는 힘없는 말밖에 없다
야윈 속삭임밖에 없다
어두워오는 들길에서 네게 줄
피에 젖은 꿈밖에 없다

08.01.25/0시 22분


130
외로울 때

외로울 때는
협퀘열차를 생각한다
해안선을 따라 삐걱이는 안개 속
차창을 때리는 흰 눈발을
눈발에 묻어오는 갯비린내를

답답할 때는
늙은 역장을 생각한다
발차신호의 기를 흔드는
깊은 주름살
얼굴에 고인 고단한 삶을

산다는 일이 때로 고되고
떳떳하게 산다는 일이
더욱 힘겨울 때

괴로울 때는
여인네들을 생각한다
아직도 살아서 뛰는
광주리 속의 물고기 같은
장바닥 여인네들의 새벽 싸움질을

밀려가는 썰물도 잡고 안 놓을
그 억센 여인네들의 손아귀를
외로울 때는


08.01.24/ 0시 25분

131
시골에서 온 편지

내 편지에는 땀냄새가 배어 있다.
종이에 깊이 박힌 볼펜 글씨에는
퀴퀴한 닭똥 냄새가 묻어 있다.
세상의 어리석음을 혼자서 지고
새벽 아직 동도 트기 전
바람에 찢긴 비닐하우스를 손질하고
가슴이 답답해서 무언가 답답해서
썼다는 내 편지에는
삼십촉 흐린 전등불이 젖어 있다.
네 아내의 부르튼 손길이 배엉 있다.

내 아픔ㅂ을 안다고 나는 말하지 못한다.
네 곁은 떠나는 자식들을 막지 않은
그래서 뉘우치고 괴로워하는
네 목소리가 밴 네 편지의 뜻을
나는 안다고 말하지 못한다.
한숨과 눈물의 뜻을 안다고 말하지 못한다.

네 편지에서는 네 뒤뚱대는 발걸음이 보인다.
긁히고 잘린 투박한 글씨에는
언 땅을 절룩거리는 빛바랜 실발이 보였다
행복한 자들의 거짓 손뼉에
짐짓 비틀걸음 광대몸짓 하면서
논과 밭이랑에 온갖 꿈을 시어온,
답답해서 오직 답답해서 썼다는
지치고 맥빠진 네 사연에서는
목쉰 새벽닭 울음소리가 소리가 들린다.
돌아앉은 네 아내의 속울음이 들린다.


132
산중

묵밭에는 산쑥
도깨비 엉겅퀴 칡넝쿨이 어우러졌다
옛날처럼 우물에는
하얀 구름이 떠 있고
노간주나무 아래 앉으면
바람 또한 시원하다

여기 살던 화전민들은
객지땅 어느 변두리에 가
떠돌이가 되었을까
구둘장에 댓돌에 밴
청솔가지 내음
빈 집터에 붉은 명아주

어리석은 일이다
뒤돌아본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입산금지 하얀 팻말 앞에서
심마니를 데리고
사진을 찍다

관관객들의 눈부신 차림
트랜지스터에는
좋아졌네 좋아졌네
노랫소리가 높고

08.01.25/ 밤 11시 54분


이 6편의 시에서
단어를 찾아본 것이 이 '신새벽' 하나밖에 없네요.
이 신새벽이라는 말도 잘 안 쓰지요.
새로워서 사전에서 한 번 찾아보았습니다.

*신새벽
어둑새벽 - 날이 밝기 전 어두운 새벽녘
한문으로는 여명黎明

'어둑새벽'에 집을 나섰다 보다
'여명'에 집을 나섰다 는 말을 더 많이 쓰지요.
'여명'은 한문인데
이왕이면 [신새벽, 어둑새벽]이라는 우리 말을 한문인 '여명'보다 더 많이 썼으면
좋겠네요.
신新은 한문 새벽은 우리나라 말...
한문과 우리나라 말이 혼합되어서 새로운 뜻을 만들어 내는 말도 많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