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필사 시

신경림 시선집 1....139.140.141.142.143.144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 21.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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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아아, 내 고장


내 친구 중에는
비행기 폭격에 맞아 죽은 아이가 있다.
아버지를 따라 이북으로 올라간 아이가 있다.
월악산에서 잡혀 십년 징역을 살고 나온 이가 있다.
행방불명 오년 만에 앉은뱅이가 되어 돌아온 이도 있다.

내 이웃 중에는
전쟁에 나가 팔 하나를 잃고 온 젊은이가 있다.
낙반사고로 반신불구가 된 광부가 있다.
땅 임자에게 여편네를 빼앗기고 대들보에 목을 맨 소작인이 있다.
집 나간 아내를 찾아 평생을 떠도는 엿장수가 있다.

이래서 내 친구 중에는
아예 세상을 안 믿는 이가 있다.
낮과 밤 없이 강과 산을 헤매이며 이를 가는 이가 있다.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멀리 떠나버리는 이도 있다.
아아, 그래도 이고싱 내 고장이라고
땅을 부둥켜안고 우는 이가 있다.

08.01.26/ 오후 2시 26분



140
내 땅

제주도에 나서
4·3 난리를 겪고
서울에서 징역살이도 했다.
38선을 넘어가서는
또 평양에서 징역을 살고,
압록갑을 건너
흑룡강성까지 도망쳤을 때는
다시는 내 땅을 밟지 않으리라
혀를 깨물었다.
만주벌 매우 바람에 몸 웅크리며
이를 갈고 또 갈았다.

그러나 삼십년,
그는 지구를 멀리 반바퀴 돌아서
내 땅 가까운 일본까지 왔다.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우울한 소식분이건만
매일처럼 바닷가에 나와
내 땅을 바라보고 섰다.

무엇일까 내 땅이란 무엇일까,
동경 뒷골목 선술집에서
나는 그에게 묻고
그는 말없이 가슴과 등줄기에 남아있는
채찍자국을 내 보인다.

08.01.26/ 오후 2시 30분



141
4월 19일
수유리 무덤 속 혼령들의 호소


치워다오
내 목을 짓누르고 있는 이
투박한 구둣발을 치워다오.
풀어다오
내 손발을 꽁꽁 묶고 있는 이
굵은 쇠사슬을 풀어다오.

저승길 구만리
짓눌린 채,
묶인 채로야 어디 가겠느냐.
진달래 피고 무덤가에
개나리가 피어도
볼 수 없는 이 짙은 어둠속을
손발 묶여 목 짓눌린 채로야
어디 가겠느냐.

치워다오
내 머리를 겨누고 있는 이
흉한 총칼을 치워다오.
막아다오
말끝마다 내 이름 들먹이고는
골방에서 숨어 키들대는
저 더러운 웃음을 막아다오.


08.01.26/오후 2시 33분


142
파도


파도가 어깨동무를 하고 밀려온다
달여와서 방파제를 온몸으로 때리고
울부짖고 소용돌이치고 발을 구르고
하얗게 물기둥이 되어 깨어진다.
다시 파도가 어깨동무를 하고 밀려온다
십년을 백년을 천년을 참아온
울분과 한과 노래를 한꺼번에 토하며
부딪치고 깨어지고 바스러지고,
파도가 어깨동무를 하고 밀려온다
동해에서 서해에서 다시 남해에서
높새에 마파람에 하늬바람에 시달리며
달려와 방파제에 머리를 부딪는다.
어버이를 빼앗긴 슬픔만이 아니다.
자식들을 잃은 원통함만이 아니다.
온몸에 뚝뚝 짙은 피를 흘리며
다시 파도가 어깨동무를 하고 밀려온다.

08.01.26/오후 2시 36분


143
해돋이를 위하여


우리는 모였다 시골읍 장거리에
바닷바람 몰아치는 선착장에
깃발 나부끼는 광장에
이 한번의 통곡을 위하여

우리는 달려왔다 달구지에 실려
무개화차* 짐짝으로 실려
비와 눈 속 거룻배에 실려
이 한번의 환호를 위하여

보라 우리의 손에 들린
낮과 갱이를 해머를 작살을
어둠을 몰아낼 이 등불을

손을 잡고 섰다 눈 쌓이 산정에
잎 진 가시나무 앙상한 언덕에
파도가 달려와 우는 바위에
이 아침의 해돋이를 위하여

08.01.26/ 오후 2시 41분
*무개화차無蓋貨車 - 덮개가 없는 화물열차.

144
일출

어둠을 밀어올리며 두 어깨로 밀어올리며
바다 위에 산 위에 공장 지붕 위에
해는 뜨고 헐떡이면서 해는 뜨고
파도에 실려 바람에 실려
솔나무에 전나무에 가시나무에
모래밭에 골목길에 벽돌담 헌 누더기에
햇빛은 부딪치고 엉겨붙고 매달리면서
외쳐댄다 잊지 말라 잊지 말라고
간밤의 어둠을 지겹도 고통을 잊지 말라고
어둠을 쫓으면서 발을 굴러 쫓으면서
피멍든 부르튼 손 서로 깍지 끼고
해는 솟아 아우성으로 해는 솟아
피멍든 부르튼 손 서고 깍지 끼고
해는 솟아 아우성으로 해는 솟아
울음에 실려 노래에 실려
빈 들판 비린 어물전 번잡한 거리를
공사장 자전거포 젖은 뱃전을
햇빛은 끌어안고 어루만지고 볼 비비고
외쳐댄다 잊지 말라 잊지 말라고
치욕의 나날 부끄럼의 역사를 잊지 말라고
어둠을 몰아내면서 몸부림으로 몰아내면서
까치떼 갈매기떼 참새떼 더불어 둘레 짜고
해는 뜨고 눈물에 젖어 해는 뜨고


08.01.27/ 00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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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국립묘지 옆에 살면서 자주 가 보면서
4.19에 대한 어떤 내용
어떤 메세지로 시를 쓸까 늘 생각을 하곤 했는데
여전히 어떤 상이 잡히지를 않네요.


그래서 수유리 4.19에 대한 시가 나오면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지요.

신경림의 시에도

제목
4월 19일

부제목으로
'수유리 무덤 속 혼령들의 호소' 라는 시가 있어서
천천히 보았네요.


죽은 넋에다가 촛점을 맞췄지요.
살아있는 자가 죽은 자에게 할말이 참 많은 것 같은데
말을 하려고 하면
마땅히 할말이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