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필사 시

신경림 시선집 1...145.146.147.148.149.150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 21. 18:47
728x90

145
친구여 지워진 네 이름 옆에


미루나무 아카시아나무 빽빽한 언덕에서
파도 달려와 몸통에 부딪는 방파제에서
이 아침의 해돋이에 그대들 환호할 때
황홀한 빛줄기에 그대들 발구를 때
아직 어둠 가시지 않는 골방에서
우리는 빛바랜 헌사진첩을 뒤적여
잃어져 끝내 돌아오지 않는
친구여 네 옛 얼굴을 찾았다
비들기 날개치며 날아오르는 광장에서
하늘 가득히 불꽃 터지는 거리에서
그대들 쉰 목소리로 노래하고 소리칠 때
어제까지의 원수와 팔 끼고 춤출 때
친구여 지워진 네 오랜 이름 옆에
우리들 서툰 이름을 적었다
내가 남기고 간 것은 피와 땀뿐이었는가
하지만 싸움은 이제부터라고
기름 묻은 손 작업복에 문지르고
흙 뭍은 석탄 손 서로 엉켜
외진 광산 먼 산역에서 술잔을 기울일 때
지난 어둠 말끔히 씻은 기쁨에 들떴을 때
우리는 잠긴 벽장을 열고 들어가
네가 빼앗기고 간 녹슨 칼을 찾았다
이제 참 속에서 거짓을 가려낼 때라
칼에 얼룩진 한 방울의 피는 말하고
온 고을에 징소리 괭과리소리 요란할 때
온 나라에 북소리 나팔소리 드높을 때

08.01.27/ 00시 34분

146
동이 트기 전

전상수리나무 쥐오줌나무 목을 잡고
푸섶에 스며서는 풀잎에 볼 비비며
바람은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친다
동이 터온다 깨어라 깨어라고.

아스팔트에 매끄러운 대리석에 달라붙어
공항에 호텔에 정원에 숨어들어
어둠은 차게 웃는다 이빨 드러낸 채
놓지 않으리 이 영화 놓지 않으리.

헐리는 산동네 흙바람 장바닥에
선창에서 정거장에서 공사장에서
바람은 몸을 굴리고 아우성치며
아침이 온다 일어나라 일어나라고.

높은 담벼락 음모의 밀실에서
어둠은 어둠끼리 팔깍지 낀 채
겁먹은 눈으로 동녘을 살피고
이어지려나 이 어둠 이어지려나.

산에 강에 바다에 들판에
나무에 풀에 바위에 자갈길에
밝음과 어둠 한꺼번에 몰아붙이며
햇빛 아아 그 햇빛 찬란히 쏟아질
아침의 해돋이 서서히 다가오고.


08.01.27/ 00시 38분


147
당신에게서 밤벌레소리를


한 그루의 소나무를 본다
억센 눈보라 몰아친 지 십년
온갖 나무 풀 떡잎으로 변해 죽고
들과 산 얼음으로 하얗게 얼어붙었을 때
다시 눈발 흩날리는 가파른 벼란 끝에
혼자 새파랗게 하늘을 이고 선
고개 꽂꽂이 들고 하늘을 향해 선
한 그루 소나무를 당신에게서 본다

가녀린 대나무를 본다
모두들 바다로 나가 돌아오지 않는
뿔뿔이 이곳저곳 떠나가 돌아오지 않는
갯마을 쓸쓸한 언덕에 서서
달빛도 지겨워 얼굴 돌리고 가는 언덕에서
홀로 마음 지키며 기다리는
서로 붙들고 엉켜 있는
가녀린 대나무를 당신에게서 본다
부서지는 파도소리를 듣는다
지나간 일일랑 잊고 모두들
술에 취해 돈에 취해 여자에 취해
작은 재미와 게으름을 즐기면서
뱃전에 선창장에 당구장에
졸며 비틀대며 낄낄대며 엎어져 있을 때
깨어 있으라 큰 소리로 외치면서
방파제에 부서지는 파도소리를 당신에게서 듣는다

당신에게서 밤벌레소리를 듣는다
서로 할퀴고 물어뜯고 꼬집어뜯고
미워하고 시샘하고 헐뜯을 때
그리하여 모두가 갈가리 찢어져
붉은 상처를 부끄럼없이 내놓고 있을 때
모여라 모여서 애기하자고
창가에 와서 애터지게 울어쌓는
그 밤벌레소리 당신에게서 듣는다

08.01.28/ 오전 0시 9분


148
어깨로 밀고 나가리라, 아우성으로 밀고 나가리라
1984년;. 민주회단체 송년의 밤에


구둣발에 짓밟히고 발길질에 차이고
총칼에 찔리고 몽둥이에 쫓기면서
우리는 탄식했다 이제 우리 곁에서
민주주의는 떠났노라고.

형제들의 꺾인 다리 친구들의
부러진 목 내 아내 내 남편 몽뚱이
칭칭 얽어맨 쇠사슬을 보면서
우리는 한숨지었다 이 땅에
다시는 자유가 오지 않으리라고.

새봄이 와도 산과 들에 꽃 피지 않고
봄바람 불어와도 숲과 나무에서
새들 지저귀지 않은 지 몇해였는가
해와 달도 빛을 잃어 대낮이 와도
한밤중처럼 어두운 지 몇해이던가.

친구들 더러는 넋과 얼 빼앗긴 허깨비 되어
늑대의 으름장과 여우의 속임수에
어릿광대춤을 추는 것을 보면서.

저들 우리들 등과 어깨를 밟고 서서
저희들끼리 눈웃음 주고받으며
우리들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리라
남몰래 주고받는 귓속말을 들으면서
이빨 부드득 갈면서
가슴팍 쥐어뜯은 지 그 몇해였는가.

그러나 몰랐으리라 저들은 몰랐으리라
우리들 어둠속에서 서로 이름 불러가며
찢어진 가슴 부러진 뼈들을 주워맞추었음을,
깨어진 어깨 떨어진 다리를 다시 꿰어맞추었음을.

땅 속에서 손과 어깨 굳게 잡으며
천천히 아아 그러나 힘차게
힘차게 다시 일어섰음을.
큰 힘으로 되살아나면서
우리를 짓누른 이 딱딱한 바위를
서로 낀 어깨의 힘으로 밀어올리고 있음을.

보라, 저들 도망치는구나 총칼 몽둥이 내던지고
신발 벗어던지고 도망치는구나
골목으로 뒤꼍으로 고샅으로 도망치는구나
비로소 저들 두려워 떠는구나
우리의 힘, 우리의 이 큰 힘에 쫓지면서.

어깨를 밀고 나가리라, 아우성으로 밀고 나가리라.
자유를 찾아서 민주주의를 찾아서,
우리를 시새우는 자들이,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이
함부로 그어놓은 저 휴전선도 밀어붙이며.

우리는 안다 저들의 교활한 눈짓 몸짓을.
언젠가 다시 고개 들고 나와
우리들 잡은 손 가닥가닥 떼어놓고
우리들 어깨 갈가리 갈라놓으리라는 것을.
우리가 잠시 머뭇거릴 때
저들 대오 바로잡으며
늑대처럼 여우처럼 덮쳐오리라는 것을.

어깨로 밀고 나가리라 아우성으로 밀고 나가리라,
이 두꺼운 바위 깊은 어둠을.
우리들 손발을 묶은 쇠사슬을 끊으면서
이 땅 둘로 갈라놓은 휴전선을 깨치면서.

어깨로 밀고나가리라 아우성으로 밀고 나가리라
자유가 올 때까지 민주주의가 올 대까지.
저들이 그어놓은 휴전선을 없앨 때까지.
그리하여 우리들 육천만
손잡고 발구르며 춤추는 그날이 올 때까지.
어깨로 밀고 나가리라 아우성으로 밀고 나가리라.

08.01.28/ 오전 00시 22분


149
하나가 되라, 다시 하나가 되라
-백두산 천지의 푸른 물을 보면서

이 짙푸른 물 속에는
말발굽소리 말울음소리 들린다
만주벌 넓은 땅을 가르던
아우성소리 창칼소리가 들린다

저 높은 바위에서는
노랫소리 웃음소리가 들린다
달밤에 무리지어 하늘 땅을 찌르던
큰 몸짓 큰 웃음소리가 들린다
옛조선 적 고구려 적 다시 발해 적
우리네 조상님네의 사랑애기가 들린다

저 하늘은 우리의 것이다 저 벌판
저 산 저 물은 우리 것이다
말발굽소리 아우성소리 노랫소리
저 큰 웃음소리는 우리 것이다
정겨운 저 사랑애기는 우리 것이다

석달 열흘 몰아치는 모래바람도 재우고
높은 산 깊은 골 나무 풀도 떨게 하던
저 억센 기상은 우리 것이다

찬 서릿밭 단숨에 녹이고
언 땅에 새파란 풀 돋게 하던
저 따스운 숨결도 우리 것이다

저 짙푸른 물 속에서는
한숨소리가 들린다
그 아우성 그 큰 웃음 다 버리고
여기 반도의 한구석에 나앉아 웅크린
어느새 우리는 못난 후손이 되었구나

저 높은 바위에서는 울슴소리가 들린다
찢고 째고 갈라져서 어리석게도
남의 총 들고 서로 눈홀기는
어느새 우리는 미욱한* 후손이 되었구나

언제부터 우리는 저 하늘을 버렸는가
내 조상님네 피와 땀이 밴
저 넓은 땅을 버렸는가

언제부터 우리는 이토록 작아졌는가
이토록 약해졌는가 이토록 어리석어졌는가
언제부터 우리는 이토록 비겁해졌는가

조상님 말발굽 아래 기를 못 펴던
이웃들의 눈치를 오히려 살피면서
형제끼리 서로 총을 겨누고
친구끼리 서로 주먹질 하며
돌아서서 원통한 눈물만 흘리는가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가 없다고
우리가 가진 것은 한과 눈물뿐이라고
비겁한 한숨으로 스스로를 달래며
돌아서서 분노의 주먹만 떠는가

저 넓은 땅 저 가없는 하늘
저 높은 산 큰 바위가 모두 네 것이라는
조상님님네의 자랑스런 타이름에
귀를 막게 되었는가

하나가 되라 하나가 되라
옛날 그 옛날의 고구려 적으로 돌아가
하나가 되어 손잡고 춤추라는
서로 부둥켜안고 큰 울음 울라는
피맺힌 한 말씀에 귀막게 되었는가
언제부터 이토록 작아졌는가

저 짙푸른 물 속에서는
울음소리가 들린다
저 큰 바위에서는 통곡소리가 들린다
말발굽소리 아우성소리 노랫소리
큰 웃음소리가 들린다

하나가 되라 하나가 되라
다시 하나가 되어 손잡고 춤추라는
조상님네의 간곡한 한 말씀이 울린다
몸에 붙은 때와 얼룩 다 씻어내고
몸에 걸친 누더기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다시 하나가 되라는
조상님네의 간곡한 큰 말씀이 들린다

08.01.27/ 오후 3시 15분
*미욱하다 - 됨됨이나 하는 짓이 어리석고 미련하다
작은말 매욱하다 - 어리석고 아둔하다
비슷 우치하다 - 한문

150
그대 가신 지 여덟 해
-장준하 선생 8주기에 부쳐

그대 가신 지 여덟 해
이 땅을 덮은 것은 어둠뿐이네
총 쥔 자 함부로 총질을 해서
수십명 무고한 이 피흘려 주게 하고
한 계집의 아양과 웃음에
온 나라의 돈이 미친 춤을 출 때
저들 뻔번스런 얼굴로 되뇌이노니
세상은 밟고 정의롭다고
여기 꽃과 노래와 춤의 동산이 있다고

그대 가신 지 여덟 해
산과 들판 강물을 덮은 것은 바람뿐이네
나무와 풀 뒤흔드는 빈 바람뿐이네
가진 것 두 주먹뿐이 착한 사내와 계집
포구에서 정거자에서 지하도에서
굶주림과 추위와 두려움에 떨 때
저들 목소리 거짓 꾸며 외치노니
나라는 부하고 튼튼하다고
여기 평등과 평화의 고장이 있다고

그대 가신 지 여덟 해
하늘을 뒤덮은 것은 오직 거짓뿐이네
땅을 흔드는 것은 오직 협박뿐이네
일터에서 쫓겨난 어린 처녀들
주먹으로 닫힌 철문 두드리며 울부짖을 때
배부른 자들 술과 계집으로 밤을 지샐 때
저들 바다 건너 남들과 눈웃음 주고받으며
거짓 호통과 주먹질 그 뒤에서 흥정하며
백성들 속이기에 신바람이 나서
눈 부릅떠 무서운 얼구로 협박하노니
보라 내게서 애국의 참모습을 보라고
따르라 이 애국의 길을 따르라고

그대 가신 지 여덟 해
세상에 번뜩이는 것은 쇠사슬뿐이네 총칼뿐이네
숨죽인 분노의 눈길뿐이네
올바로 보는 자 눈을 뽑히고
들을 것을 듣는 자 귀를 잘리고
말할 것을 말하는 자 혀를 찢길 때
의심하는 자 목을 잘리고
억울한 이들의 피로 온 고을이 바다가 될 때
저들 거짓에 스스로 취해 부르짖노니
누가 이땅이 썩었다 하는가
누가 이땅에 두려움이 있다 하는가

그대 가신 지 여덟 해
어둠은 어둠을 낳고 바람은 바람을 불러 더 깊고 세차질 때
거짓은 더욱 가증스러워지고 속임수 더욱 간교해질 때
우리는 보네 곳곳에 돋아나는 새싹을
비바람을 딛고 맺은 새파란 열매를
온 누리에 퍼지는 우렁찬 노래를
그리고 우리는 아네 그것이 그대가 뿌린 씨앗임을
그리하여 그 새싹 그 열매 그 노래
그대 앞에 모여서서 다짐하노니
어둠을 몰아내리라 거짓을 쫓자내리라
쇠와 칼과 사슬을 깨부수리라
이곳에 이 땅에 참된
자유와 평등과 평화의 나라를 이룩하리라

그대 가신 지 여덟 해
우렁찬 노랫래소리 온 누리에 울려퍼지네
하늘과 땅에 높이 솟구치네

*이 시는 고 장준하 선생 7주기에 썼던 추도시로서 8주기에 재낭독했는데
첫 절은 1982년에 있었던 우순경 ·장여인 사건을 각각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