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감나무
늑대가 자주 나온대서 늑대골
거기서 그는 아내를 만났다
눈 하나 찌그러진 황아장수
그 홀아비와 천더기 딸.
첫째 낳고 둘째 낳고
운동회다 환갑잔치다
사타구니 불나게 술통 나르고
난리 겪어, 물난리 겪어.
그 통에도
울 뒤에 감나눔 심어 곶감 깎고.
벅차고 고달팠지만
그래도 세상살이엔 기쁨이
더 많아서.
감나무 고욤나무 사이로
뜨는 달은 아름다웠다
다투고 풀고 다시 싸우다 보면
찬 하늘에 어느새
새빨간 감만 대롱댔는데.
모두가 물에 잠겼다
타관 객지땅 지게품으로 떠돌다
돌아와 보니
대롱대는구나 새빨간 감만이 매다려.
찬 하늘에서 까마귀만 울고
기쁨도 다툼도 눈물도 물에 잠겨
아아, 사는 일 그 모두가
물에 잠겨서.
08.01.25/ 밤 11시 58분
134
시골 이발소에서
금간 거울 속에
빛바랜 사진관 간판이 기우뚱 걸려 있다.
어머니와 딸이
삐걱거리며 층계를 오른다.
이 마을에 제일 먼저
도시의 유행을 전해주던
그 늙은 사진사는 여전히 다리를 전다.
거울 속에서 고르지 못한 발자국소리.
이윽고 어머니가 삼십년 전의 딸이 되어
쿵쿵거리며 충계를 내려오고
금간 거울 속에
세월이 빛바랜 사진이 되어 걸려 있다.
08.01.26/ 00시 01분
135
새 아침에
간밤 이슥토록 눈이 오더니만
새 아침 맑은 햇살 안고
옛친구 날 찾아온다
찌갤랑 끓거라 두고
이 골목 저 골목 눈을 밟는다
고드름 맺힌 지붕
정다워 창문을 기웃대면
거기 옛날에 듣던
낭랑한 토정비결 읽는 소리
세월은 솔나무 스치는 바람
삶은 댓돌에 쌓인 눈송이
문득 서러워 눈을 드니
친구의 허연 머리칼 착한 웃음
어느새 또 한 해가 갔구나
08.01.26/ 00시 20분
136
정월의 노래
눈에 덮혀도
풀들은 싹트고
얼음에 깔려서도
벌레들은 숨쉰다
바람에 날리면서
아이들은 뛰놀고
진눈깨비 눈 못 떠도
새들은 지저귄다
살얼음 속에서도
젊은이들은 사랑하고
손을 잡으면
숨결은 뜨겁다
눈에 덮여도
먼동은 터오고
바람이 맵찰수록
숨결은 더 뜨겁다
08.01.26/ 00시 29분
137
진달래
1
냇물 타고 내려온 복대기가*
마당을 덮은 가겟집
싸리목 산울타리에
진달래가 섞여 피였다
키가 큰 그 집 의붓딸이
나는 좋았다
가겟방 들마루에 나앉으면
소나무 가지 사이로
달 뜨는 게 보이고
그애 제 죽은 애비 자랑에
툭하면 밤이 깊었다
후미진 골짝 돌자갈 밑에 누워
소쩍새 울음에 눈믈 삼킬 그애 애비
2
나는 삼짇날 그애 꿈을 꾼다
산울타리에 섞여 피던
진달래를 본다
재봉틀에 손 찔리며
쏟아지는 잠 쫓는 그애의 딸을 본다
골목 안을 서성대는
가난한 어머니를 본다
무엇인가
우리를 하나로 묶고 있는
이 길고 질긴 줄은
소나무 사이로
달 뜨는 걸 본다.
08.01/26/ 00시 38분
*복대기 - <광> 광석을 빻아 금을 거의 잡고 난 뒤 방아확 밑바닥에 처진 돌가루나 물과 함께 흘러나오는 광석가루
138
함경선
김병걸 선생의 회갑연에서
김규동 시인은 말했다
기차를 타고 올라가다가
경성까지 가는 나에게는 잘 가라 악수하고
그는 이원에서 내리는
그날을 보아야겠다고,
관모봉을 끼고 돌아 부령, 고무산,
두만강까지 가는 친구들이 함께
다시 보자고 차창에서 손을 흔드는
그날을 꼭 보아야겠다고.
개마고원에서는
갈대들이 달빛에 흔들리고 있겠지.
키작은 고산목들이
돌아오지 못하는 친구들의 이름 찾으며
하늬바람에 몸 웅크리고 있겠지.
그날 우리는 함경도집에서
순대로 늦도록 소주를 마셨지만
누구인가, 우리들의 이 애나는 마음을
칼로 토막내어 길거리에 팽개치곤
돌아서서 웃고 있는 자들이.
08.01.26/ 아침 10시 40분
*복대기 - <광> 광석을 빻아 금을 거의 잡고 난 뒤 방아확 밑바닥에 처진 돌가루나 물과 함께 흘러나오는 광석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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