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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지 /고정희
어머님과 호박국이 그리운 날이면
버릇처럼 한 선배님을 찾아가곤 했었지.
기름기 없고 푸석한 내 몰골이
그 집의 유리창에 어른대곤 했는데,
예쁘지 못한 나는
이쁘게 단장된 그분의 방에 앉아
거실과 부엌과 이층가 대문 쪽으로
분주하게 오가는 그분의 옆얼굴을 훔쳐보거나
가끔 복도에 낭낭하게 울리는
그 가족들의 윤기 흐르는 웃음 소리,
유독 굳건한 혈연으로 뭉쳐진 듯한
그 가족들이 아름다움에 밀려
초라하게 풀이 죽곤 했는데,
그분이 배려해 준
영양분 가득한 밥상을 대하면서
속으로 가만가만 젖곤 했는데,
파출부도 돌아간 후에
그 집의 대문을 쾅, 닫고 언덕을 내려올 땐
이유 없이 쏟아지던 눈물.
혼자서 건너는 융융한 삼십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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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 유고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여백을 남긴다"
앞 날개에 실린 사진에서 보면 고정희 시인은
투사 같고 성격도 괄게한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그의 연시들은 하나 같이 가슴이 아프고
이 '객지' 시 또한
고정희의 또 다른 내면을 보는 것 같아 맘을
찡하게 하네요.
고정희 시집을 다 사보려고 했더니 출판된지 오래되어서
절판된 것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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