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씨앗을 받아들고 /이기철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 28.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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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을 받아들고

 

이기철

 

 

씨앗에서 열매까지의 길을

어린 나무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

이제 곧 겨울이 와 세상이 조그마해지면

나는 전기밥솥에 쌀을 안쳐놓고

그 위에 녹두콩 완두콩도 두어 개 띄워놓고

솥이 제 몫의 일을 하는 동안

좋은 세상이 어디쯤까지 와 머무는지 알아보러

동구 밖으로 나가보리라

샐비어 잎에 새똥이 마르고

도랑물소리가 발목에 감기리라

밤에는 흰 노트를 펼쳐놓고

내 지은 죄의 목록을 흑연으로 기록하리라

분노 한 사발, 증오 한 그릇, 사랑 한 대접, 노래 한 다발

그리고 부질없이 펴놓은 세상일들을

출석부의 이름 부르듯 불러들이리라

한랭 겨울, 흰 눈이 하는 일을

내 손이 맡으리라

손가락이 곱으리라, 마음이

헝겊처럼 펄럭이리라

 

 

 

계간시와 시학(2020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