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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을 받아들고
이기철
씨앗에서 열매까지의 길을
어린 나무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
이제 곧 겨울이 와 세상이 조그마해지면
나는 전기밥솥에 쌀을 안쳐놓고
그 위에 녹두콩 완두콩도 두어 개 띄워놓고
솥이 제 몫의 일을 하는 동안
좋은 세상이 어디쯤까지 와 머무는지 알아보러
동구 밖으로 나가보리라
샐비어 잎에 새똥이 마르고
도랑물소리가 발목에 감기리라
밤에는 흰 노트를 펼쳐놓고
내 지은 죄의 목록을 흑연으로 기록하리라
분노 한 사발, 증오 한 그릇, 사랑 한 대접, 노래 한 다발
그리고 부질없이 펴놓은 세상일들을
출석부의 이름 부르듯 불러들이리라
한랭 겨울, 흰 눈이 하는 일을
내 손이 맡으리라
손가락이 곱으리라, 마음이
헝겊처럼 펄럭이리라
⸺계간『시와 시학』(2020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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