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읽고 -수필

칸나가 피는 오후 /이이화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8. 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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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나가 피는 오후

 

이이화

 

 

하늘거리는 연분홍 블라우스

여미면서

봄날이 떠나간 도로 한 귀퉁이

수다쟁이 여름 붙들어 세워 두고

여자가 도착했다

늘씬한 큰 키에 걸친

푸른 원피스 자락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차창 밖으로 휘파람 날리는 사내들 눈빛이 위태롭다

한 올 한 올 짜내려 간

노른자 같은 시간들이

너무 느슨하거나

너무 팽팽하게 당겨지는지

새빨간 립스틱만

자꾸 덧칠하고 서 있는 여자

계절은 지나온 시절을 복사하다가

붉은색 잉크를 엎질러

체감온도 급상승을 찍고 있는데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한낮

타는 목 길게 빼고

싼 티 나는 웃음 치대며

여름을 팔고 있는 그 여자

칸나

 

 

 

―시집『칸나가 피는 오후』(그루,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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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만 되면 칸나가 눈에 밟힌다. 저한테 아무 빚진 것도 없는데 마치 빚을 진 것만 같고 내가 서 있으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내가 벌 주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건 아마도 잊지 못하는 한 사람 때문이리라. 오래전 어머니 보내고 돌아오는 날 칸나가 염천에 서 있었던 것이다. 시에서처럼 늘씬한 키에 푸른 원피스가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살아생전 땡볕에 지심 매었을 어머니가 오버랩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어느 한여름 산행을 마치고 하산하다가 산자락 뒤로 하고 서 있는 아파트 단지 한쪽에 붉게 피어있는 칸나를 보았다. 폭염에 산행을 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시원한 물 한 모금의 그 맛을... 물을 넉넉히 챙겼지만 길어진 산행 탓에 물은 바닥이 나고 갈증에 마른침이 넘어갈 때 칸나는 그 목마름의 갈증을 묵묵히 견디고 서 있는 것이었다.

 

  칸나를 보는 순간 갑자기 또 미안하고 죄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도 나고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것만 같아 가다가 돌아보고 가다가 또 돌아보았다. 어쩌면 정말 나는 땡볕의 그 칸나에게 전생에 어떤 빚을 진 것일까. 빚을 낸 것도 없으니 분명 빚 진 것도 없는데 대출업자처럼 불쑥 나타나 왜 자꾸만 나에게 빚을 갚으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칸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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