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43) / 꿈과 전설 - 김근의 ‘江, 꿈’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43) / 꿈과 전설 - 김근의 ‘江, 꿈’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43) / 꿈과 전설 - 김근의 ‘江, 꿈’
江, 꿈
김근
꿈에, 누이야, 살랑거리는 물주름도 없이, 강인데,
이따금씩 튀어오르는 피래미 새끼 한 마리 없이
푸르스름한 대기 살짝 들떠, 미명인지 저녁 어스름인지,
간유리처럼 커다란 인광체(燐光體)처럼, 보일 듯 말 듯
제 꼬락서니 드러내는 나무와 풀과 길과 마을 품고,
가벼이 얽은 얼굴에 드러나는 마마 자국마냥, 서툴게시리
산과 들과 세상이 밝음과 어둠의 바깥에, 흐르지 않고
강인데, 누이야, 허옇게 물안개만 피어올라 몽글몽글,
자울거리는 시간하고 노닥노닥, 안개에 싸여 오두마니, 나,
어디 기척이나, 배곯는 밤부엉이 소리나 어디,
그저 한참을 앉아만, 나, 내가 참말 나인지도 모르게 앉아만,
혹 바람이라도 불었던지 누구의 입김이라도,
배 한 척, 깜깜한 안개 사이로, 삐걱거리며 빈 나룻배,
나한테로 헤적헤적 안개 헤치며 강 저편에서,
없더니 아무리 눈 씻고 보아도, 빈 나룻배
도로 가는데, 강 저편에서 흑흑대는 소리, 헌 광목치마
찢어발기듯 소리, 온몸의 힘줄이란 힘줄 다 불거져 툭,
툭, 터지는 소리, 소리에 비늘을 세우고 한꺼번에, 안개가, 나를, 나를,
그제서야 보여, 파르르 흔들리는 거, 강가의 사시나무 이파리 하나
그 흔들림 속으로 강도 안개도 산도 들도
나무도 풀도 길도 마을도 대기도 어둠도 밝음도
나도 시간도 한가지로 흔들림 속으로, 꿈에 누이야
그만 몽정을, 나, 너를 보듯,
-『문학동네』(1998. 겨울)
<해설>
꿈의 세계는 무의식 내지 잠재의식의 세계다. 이 시는 일단 프로이트식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해보는 것처럼 해몽 책을 펴놓고 유사점을 찾아볼 수도 있겠다. 신화비평이나 심리주의비평으로도 꿈의 세계에 대한 접근이 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달래고개 전설과 연관시켜 해석하고 싶다. 이성에 대한 욕망에 시달리던 한 청년이 누이와 함께 산길을 간다. 소나기를 만나(혹은 개울을 건너다) 흠뻑 젖은 누이의 뒷모습을 보게 된 오라비는 발기된 성기가 너무나 부끄러워 누이를 먼저 가라고 한 뒤 돌로 자기 성기를 내리쳐 목숨을 끊는다. 이 전설에 나오는 지명 ‘달래고개’는, 용변을 다 봤을 시간인데도 안 따라오는 오라비가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있는 것을 보고는 “한번 잘 달래나 보지”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제1연의 “강 저편에서 흑흑대는 소리, 헌 광목치마/찢어발기듯 소리, 온몸의 힘줄이란 힘줄 다 불거져 툭,/툭, 터지는 소리”와 제2연의 “그만, 몽정을, 나, 너를 보듯”은 전설을 재구성한 것이 아닐까. 그것이 아니라면 이 시의 강은 레테의 강처럼 이승과 저승 사이를 흐르는 강일 터이다. 시가 꿈과 현실, 허구와 사실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쉼표가 아주 많이 동원되었다. 즉, 이 시의 매력은 쉼표에 있다. 그냥 좀 쉬었다 갈 것이지.
출처 : 뉴스페이퍼(http://www.news-pap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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