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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근법 배우는 시간
송진권
빼빼 마른 여자가 바닥에 화구를 펼쳐놓고 앉아 있는 집입니다
모르는 돌과 꽃에서 뽑아낸 안료를 색색으로 펼쳐놓고
여자는 처음 보는 새 한 마리를 그려냅니다
한 마리 한 마리가 포개지고 겹쳐집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새떼입니다
몇 마리나 되겠느냐고 여자는 묻습니다
대답을 못 합니다
덧칠한 그림 위에 또 덧칠된 새들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자는 천천히 화구를 걷습니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옵니다
방 안은 깃 치는 소리 지저귀는 소리로 시끄럽습니다
마당을 지나 대문을 나옵니다
구름들 지붕들이 쏜살같이 그 집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대문이 닫히는 소리
새들이 파닥이며 날아오르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습니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모릅니다
왜 그 새떼가 지금도 내 주변을 맴돈다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언젠가 내가 피로 뭉쳐지던 때
형체도 갖지 못했던 붉은 덩어리일 때의 기억이 아직
지워지지 않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시집『원근법을 배우는 시간』(창비,,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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