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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속의 바다
김은상
나는 누구의 무덤이 되겠습니까.
저녁의 귀밑머리 아래서 파도가 흘러옵니다.
너무나 화창한 밤이어서
죽기 좋은 하이델베르크의 물결입니다.
밤의 눈썹 끝에서 포말로 부서지는
별빛들이 돌의 적막 속에서 출렁입니다.
한 줌의 희망과 한 모금의 기쁨도 없이
마른 생을 살아간다는 건
소리칠 수 없는 비명을 삼키는 일입니다.
날개를 파산한 새들에게 하늘은 관념입니다.
그리하여 나의 연명은 이명입니다.
그리움도 연민도 다 써버린 지 오래인데
비겁하게도 나는 눈사람을 만듭니다.
내 삶의 가장 큰 실패는 시에서 왔지만
시인이 되지 않았더라도
성공적인 인생은 없었을 것입니다.
가여운 하이델베르크의 성벽이
나의 가없는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병든 아버지가 죽고 알게 됐습니다.
내 뜨거웠던 사랑의 원천은 증오였고
생의 절박함은 오해에 자라났습니다.
심해 같은 하이델베르크를 유영합니다.
해녀의 발목을 매만지는 푸른 열과
바다를 음각하는 수평선이 흘러옵니다.
파도의 끝자락에 서 있는 갈매기가
부러진 발톱을 꼼지락거립니다.
추억은 죽음을 향해 놓인 선로입니다.
창공이 돌 속에서 눈동자를 깜박이는
깊은 물결 속에서 주마등을 켭니다.
나는 가로목 한 칸,
그 한 칸들의 우울 속으로 돛단배가 지나갑니다.
부표처럼 한 생을 떠도는
돌 속의 바다,
태어나기 전에 이미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현대시』 (2022,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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