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나방은 누가 풀어 놓았을까 /김성신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2. 11. 12.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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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방은 누가 풀어 놓았을까

김성신

 

예감은 때로 정지신호,

가늘어진 말들이 마른 기침소리를 낸다

 

침묵은 세상 밖의 노선

선뜻 다가서지 못하고 두리번거릴 때,

아프다고 소리치지 못하고 나를 잠글 때,

벼린 시간이 나뭇등걸에 매달려 있다

 

부랑자가 뱉은 마른기침을 먹고

공원의 편백은 무심히 자라 반백이 되고

다닥다닥 붙어 가계를 꾸리겠지

 

음률을 고스란히 옮긴 떨리는 손의 음표들

슬픔 위에서도 가볍게 내려앉아 기꺼이 날아오르려는 눈빛

내딛던 발을 걷은 껍질처럼 공손한 자세로 공벌레들이 웅크려있다

그늘이 거느리는 길을 묵묵히 따르는 당신

나방을 뒤따르는 한 무리의 침묵

어둠이 흩어지고 남긴 서늘한 빛무리 속으로

울고 남은 몇 개의 말들이 저녁으로 이운다

내가 버린 칼날의 곡들은 어디에 기대어 있을까

흰 뼈들이 공중을 떠돌고

입술 달그락거리던 석양이 홰를 친다

 

어느 쪽을 돌아봐도 낯설게 웃고 있는 얼굴들

어떤 생각은 날개가 꺾인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묻고

핏기 없는 바람이 난간 끝에서 발끝을 모은다

진눈깨비처럼 쌓여가는 내 어깨의 석회

 

버스가 마지막 정류장에 정차했을 때

 

나도 모르게 나온 노랫가락을 붙잡고

눈 속의 혀는 오랫동안 습기를 핥고 있다

비로소 인적이 사라진 고행 속으로 날아가는 나방들

그 뒤를 맹목으로 따르는 어슴푸레한 것들이

잡힐 듯 잡히지 않은 채 멀어지고 있다

 

오늘의 바깥이 자꾸만 겨드랑이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ㅡ시집『동그랗게 날아야 빠져나갈 수 있다』 (포지션,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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