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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
박라연
이 세상 모든 눈동자가 옛날을 모셔와도
마시고 만져지면서 닳아지는 물질이
이제 저는 아니랍니다
생각하는 일만 허용되는 색깔로 살게 되었습니다
천근만근 애인의 근심만은 입에 물고 물속으로
쿵 눈빛마저 물에 감기어져 사라질 태세입니다
그림자의 손이 아무리 길게 늘어나도
ㅉ이 ㅃ으로 ㄴ이 ㅁ으로 쳐질 때 있습니다
한계령에 낙산사 백사장에 우리 함께 가요,라고
말할 뻔했을 뿐입니다
생각만으로 벼린 색이 되는 날이 제겐 있었어요
그림자 스스로 숨 거두어 가주던 그날
배고픈 정신의 찌
덥석 물어주는 거대한 물방울의 색깔을 보았습니다
ㅡ시집『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문학과지성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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