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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끝에서
우남정
흘러넘치듯 능소화가 담벼락에 매달려 있다
열매는 꽃에 매달리고 꽃은 줄기에 매달리고 줄기는 뿌리에 매달린다 뿌리는 지구에 매달려 있고 지구는 우주에 매달려있다 매달린 것을 잊고 매달려 있다
산다는 것이 매달리는 것일까 저 여자의 가슴에 젖이 매달리고 등에 아이가 매달리고 팔에 장바구니가 매달리고 장바구니는 시장에 매달리고 저 여자는 집에 매달려 있다
손가락은 카톡에 매달려 있고 수많은 당신에 매달려 있다 당신은 씨줄과 날줄, 그물에 매달려 있다
‘매달리다’라는 말에는 오래된 슬픔이 묻어난다 ‘매달리다’라는 말에는 핏방울이 맺혀있다 ‘매달리다’라는 말에는 굴욕의 기미가 있다 ‘매달리다’라는 말에는 ‘솟구치다’의 그림자가 매달려 있다 그 끝에 거꾸로 솟은 종유석이 자란다
매달리는 것은 추락을 견디는 것 오래 바람을 견디는 것 길게 휘어지는 촉수를 말아 안고 잎사귀 뒤 나뭇가지 끝에서 잠을 청한다
―시집『뱀파이어의 봄』(천년의시작,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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