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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시
박소란
결국 이런 시를 쓰게 될 줄 알았지
오오 이토록 시시한, 으로 시작되는 시
채 첫 연을 읽기도 전에 당신은
당신의 예민한 손가락은 책장을 덮어버릴지도 몰라
이를테면 이런 것 도무지 시적이지 않은 것
아침마다 당신이 사는 동네를 지나는 만원 버스
나는 늘 그 꽁무니나 죽어라 쫓는 거지
맨 끝 좌석엔 당신을 닮은 누군가 팔짱을 끼고 앉아
졸음이 잔뜩 묻은 뒤통수나 하릴없이 흔들고
그 지극히 사소한 모양으로 내 심장은 뛰지
9시에 출근해 6시에 퇴근할 때까지 그리고 문득 야근할 때까지
놓칠 게 뻔한 버스를 저만치 앞에 두고
온종일 나는 시시하지 너무 시시해 가끔은 눈물이 나
느닷없이 밀려오는 허기처럼 허기보다 먼저 구겨진 가방 속 빵봉지처럼
안 된 일이지만 내 평생이 이 따위 한낱 관용구로 채워지리라는 사실
무미한 혼잣말이나 읊조리며 종점을 향하리라는 사실 뻔하디 뻔한
일들만이 나를 놀라게 하겠지 그래 일찍이 나는 알았지
이런 시나 쓰게 될 줄, 오오 이토록 시시한, 으로 끝나는 시
끝나지 않는 시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이 시가 대체 어느 누굴 흔들어 깨울 수 있다는 건지 그래서 당신은
흔들렸다는 건지 어쩌다 잠시 잠깐
노선에도 없는 여기 변두리에 정차한 당신은 왜
-계간『시작』(201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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