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슬픔을 위한 변명 / 김승강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1. 12. 22:54
728x90

  슬픔을 위한 변명


  김승강


 

  슬픔도 힘이 세야 해
  스스로 판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슬픔은 슬픔이 아니지
  그대가 건강을 위해 주말마다 산에 오르듯
  내가 새벽같이 일어나 운동을 하는 것은
  슬픔의 힘을 기르기 위한 것
  나도 모르는 사이 어느날 운명처럼 내 속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나갈
줄 모르는
  내 슬픔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한 것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온 신기를 거부하지 못해 결국은 신내림을 받은
애기무녀처럼
  어쩔 수 없는 운명이란 있는 법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면
  슬픔은 어디선가 슬금슬금 나와 방 한쪽에 세워둔 기타를 잡아채고 앉

  그러면 나는 슬픔의 제단에 술을 준비하고
  슬픔이 첫 연주곡으로 슬픈 예배당*을 연주하기를 기다린다네
  첫곡을 끝내면 슬픔은 제단 위의 술을 연거푸 들이켜고
  다시 술의 힘으로 기타연주를 이어가지
  이번에는 자신을 사랑했다 자신의 슬픈 운명을 대신해 죽은
  한 여인을 추억하기 위한 곡이지
  기타소리는 울려퍼져 온 마을을 적시고
  그러면 마을은 온통 내 기타 선율에 취해 슬픔에 젖는다네
  아 그러나 동화나라의 공주처럼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나는 기타
를 내려놓고
  잠을 청할 수밖에 없다네
  내가 잠자리에 든 뒤에도 마을은 스스로 새벽까지 깊은 슬픔 속으로 빠
져들지
  새벽이 오면 나는 잠에서 깨어 자전거를 타고
  간밤 내 기타 선율에 취해 흥청이던 마을을 가로질러 운동하러 간다네
  그것은 그대가 이 마을에서 사귄 친구들과 오랫동안 술잔을 기울이기
위해
  산을 오르며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듯
  슬픔의 힘을 기르기 위한 것
  슬픔을 더 오래가져 가기 위한 것
  슬픔을 죽음까지 가져가기 위한 것
  슬픔도 힘이 세야 한다네
  스스로 판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슬픔은 슬픔이 아니지
  오늘밤 나는 또 운명처럼 슬픔에 젖고
  내가 사는 마을은 또 술에 젖겠지

 


* 슬픈 예배당(Triste Santuario) : 고메즈(V. Gomez) 작곡의 클래식기타 연주곡

 

 


-계간『딩아돌하』(2012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