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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꽃 - 조운/장석남/김선우/김용락/장예은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5. 27.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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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꽃


조운

 


무꽃에 번득이든
흰나비 한 자웅이

 

쫓거니 쫓기거니 한없이
올라간다

 

바래다
바래다 놓쳐
도로 꽃을 보누나.

 

 

(『조운 시조집』.남풍. 1990 )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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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꽃


장석남

 

 

혼자 한 번 간 길도 길일까

무꽃이 피었습니다 하고 몰래 숨어 가는 길

혼자 한 번 가는 길 남들 다 자리잡고

피었다가 간 언덕 아래 깃발도 없이

깃대도 없이

몸뚱이 하나로 당도하는 늦은 봄의

저 혼자 오는 가슴을

우 우? 화염병처럼

무밭에 피웠다

앞뒷길 모두 풀과 나무의 푸른 바리케이트로 막힌

곳에서 성스러운 늦은 봄을 위하여

숨가쁜 며칠을 살고 혼자 가는 길

아무도 걷지 않는 길

도 길일까

나의 노란 고름들이

늦봄을 이끌고 어디 어디로 간다

 

 

 

-시집『새떼들에게로의 망명』(문학과지성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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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꽃


김선우

 


집 속에
집만한 것이 들어 있네


여러날 비운 집에 돌아와 문을 여는데
이상하다, 누군가 놀다간 흔적
옷장을 열어보고 싱크대를 살펴봐도
흐트러진 건 없는데 마음이 떨려
주저앉아 숨 고르다 보았네


무꽃,
버리기 아까워 사발에 담아놓은
무 토막에 사슴뿔처럼 돋아난 꽃대궁


사랑을 나누었구나
스쳐가지 못한 한소끔의 공기가
너와 머물었구나
빈집 구석자리에 담겨
상처와 싸우는
무꽃

 

 

 

-시집『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창비,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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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꽃


김용락

 


봄날에
녹평 사무실에서 건너다 뵈는
뒷산비알의 노란 무꽃을 보면서
세상일에 너무 쉽게 화낸 자신을 뉘우친다
지켜보는 이 없이도
꽃들은 저리도 타오르는데
채마밭 같은 고향에서 튕겨 나와
도시 외곽을 전전하면서
누군가를 섣불리 사랑하고
또 성급히 아파한 마음의 골짜기엔
산새 소리가 남아 있다

 

 


-시집『단촌역』(문예미학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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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꽃

장예은

 


무꽃 피고 있었는데요
세상이 온통 제 것인 양
젖통 허리통 까놓고 편안해보였는데요
꽃샘물길 퍼 올리며 퍼트리는 웃음
사방이 화사하게 즐거웠는데요
벌 나비 수작이 한창인데요
신혼방이 무르익을 무렵, 아닌 대낮에 홍두께인가요
벼락이 치고 천둥 치고 소낙비 우루루 쏟아져 내렸는데요
나비는 사라지고  벌 한 마리 없었는데요
저항하듯 함초롬한 낮짝 덜덜 떨며
젖은 꽃 매달려 아프기만 한데요
눈부신 시절이 한 순간이라는 것
꽃도 알고 나비도 알고 나까지 아는 사실이지만요

모른 척 딴청피우며
망초 꽃대 위만 기웃거리는 당신
텃밭에 무꽃이 만발한데요
환하게 피어 눈이 부신데요
당신만이 그걸 모르고 계시니
모가지, 달아날 각오로 안달할 수밖에요

 

 

 

-계간「시에」(2007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