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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숙 - 묵형墨刑 / 신궁에 들다 / 올해, 늦은 여름 / 내 안의 불빛들 / 드림, Dream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4. 6. 23.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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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형墨刑

 

유현숙

 

 

나뭇잎을 덮고 잠들었습니다 잠 속으로도 비는 들이칩니다

 

볕 좋은 오후에는 집을 나서지만

골목 끝이 짧고,

그만 되돌아 옵니다

사람들 속에서도 나는 춥습니다


단단한 목질인 자단紫檀은 짜개면 도끼날에 자색 물이 묻어 납니다

땅이 뜨거워지는 여름과 지리한 장맛비의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지요

지열과 습풍이 나무뿌리에 그립게 스민 까닭이지요

 

내 안에다 자자刺字한 이야기들 말고는 무엇으로도 형상하지 못한

젊은 날의 문자들이 있습니다

자단 같은 날들이라 부를까요

천둥이 몇 차례 울고 바람이 붑니다 높은 산의 그늘에서는 철쭉꽃들이 부서지고 있습니다

그늘에 누운 꽃은 통째로 말라가고

당신을 보낸 뒤 나는 아직도 내실內室의 커튼을 걷지 못합니다

마루에서도 방에서도 커튼은 무겁습니다

오래전에 당신은 내 살을 타서 열고 별 한자리를 묻었지요

살을 꿰어 시침질한 자국은 당신이 남긴 마지막 말씀이라 여겨도 되는지요

나는 쓸쓸해져서 오래도록 들여다 봅니다

사기 찻잔에 스민 차 맛처럼 쓸쓸함이란 나를 아프게 합니다

미궁에서 보내는 수금囚禁의 시간입니다


지난날이 깊어지면 늘 이렇습니다 당신이 떠난 뒤 잠 속으로도

비가 들이칩니다

 

 

 
신궁에 들다

 

 

 

칠월은 구름이 무겁다 산과 들판을 뒤덮고 꼼짝 않는다

백 년만의 긴 장마라 했다 밤새워서 비가 내린 다음 날이다

풀끝에 맺힌 빗방울이 아직 무겁다

누가, 빗방울을 흔드는 저 바람만이 신들을 위하여 향초를 기르고 수금을 탄주하는 신궁까지 닿는다 했던가

첫 차가 양원역을 지난다

나의 지난 생이 그랬다, 첫 새벽 열차를 타도 닿는 곳이 없었다

신궁은 어딜까

비 젖은 들판을 지나면 그 들판 끝에 내리는 햇살처럼 단순하고 느슨하고 슬몃해지면

거기, 신들의 침전에 들 수 있을까


의사는 내가 병명이 없는 병을 앓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불안이나 권태나 절망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한다

학명 없는 푸른 균이 신경계를 파먹어 모든 길이 구불텅하기도, 끊어지기도 한다고……,

나는 차돌처럼 단단해지기고 차가워지기도 하지만

어떻게 죽음 앞에서 무연해 질 수 있단 말인가

오늘도 닿는 곳 없는 열차를 탄다

내가 두고 온 먹구름 덮인 여름의 저 끝에서 난장의 울음소리 들린다

나에게 신궁은 없는 걸까


 

 

 

올해, 늦은 여름

 

 

 

미츠시마마치의 나기에서 며칠을 묵었다, 나기?는 바람이 멎고 물결이 잔잔해 진다는 뜻이다

큰 비도 큰 바람도 순해지라는 해안 사람들의 기원이 담긴 말이다

내 안의 소용돌이나 소용돌이 따라 빠르게 휘도는 시간도

이곳에서는 자는 듯이 잠재울 수 있을까

 

다다미에 배를 깔고 뒹굴기도, 땅 끝 마을이라는 츠츠까지 달려가 해안 길을 걷기도, 안개 자욱한 삼림森林에서는 아픈 뼈를 꺼내 안개에다 닦기도 했지만

바다 건너까지 따라 온 공허와 피로는 간밤에도 내 곁에 긴 사지를 누이고 있다

이루지 못한 꿈을 깬 새벽이면 해안을 따라 오래 걸었다

수평선 너머 하늘은 잠시 붉어졌지만 먹구름에 가린 아침 해는 끝내 바다를 깨우지 못한다

물결이 세차게 밀려들고 사람이 없는 바닷가를 거닐며

나는 누군가가 그리웠다

집어등을 아직 밝힌 오징어잡이 배들이 밀물에 밀리어 항구로 돌아온다

일기예보는 태풍이 올꺼라 한다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아름다운 것일까

강판처럼 단단해 보이던 바다도 이내 절벽 같은 물기둥을 세워 부두를 때리며 부서지고 흩어진다

그때마다 나는

척박했던 한 세기 전 현해탄에 몸을 던진 한 젊은 여인을 생각하기도 했다


숲은 오늘도 안개에 묻혔다

나는 어디서도 길을 잃을 수 있겠구나

오늘은 나기를 떠나야겠다

 

 

 


내 안의 불빛들

 

 

 

안금*마을 앞내에서 사촌들이 투망질을 한다

저녁 해가 붉다

싸이나를 푼 수면 위로 배떼기를 뒤집고 떠오른 물고기들이 은빛으로 빛난다

 

어둠이 내리면 처마 끝에다 가스등을 내걸고 서울살이 하다 내려온 종부宗婦는

공기를 펌프질 한다

어둡고 검은 침엽수림에서 부엉이가 우는 것은 그때다

불빛이 자라며 더 밝아진 불빛 아래 무겁게 흔들리던 시간들,

지난날의 기억들이 물고기의 비늘처럼 빛난다

 

두리반에 둘러앉아 사촌들과 어죽을 먹으면

밤이 늦어도 장손의 이야기는 끝날 줄 몰랐다

누군가의 등에 업혀 어렴풋이 잠들곤 했던

누에를 치고 과육을 따던

등 뒤편 사람들은 늘 따뜻했다

 

안금마을 뒷 숲에는 늙은 신들이 산다

강물소리가 죽는 밤이면 신들이 켠 불빛이 마을에서 보인다

 

 

*경남 거창 소재

 

 

 

 

드림, Dream

 

 

 

인도차이나 반도 남서부의 캄보디아, 거기서 한국 남자를 만났다

남자를 만나고 돌아와서 나는 앓았다

수상 가옥을 덮은 야자수 잎이 굵은 빗물을 받아내던 여러 날이 지났다

야자수 잎을 타고내린 빗방울이 강물로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날

담요를 개키고 일어났다

비 그친 강 위로 밤은 빠르게 오고 별빛은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일어 난 지 이틀 만에 그 남자와 우리 마을에서 캄보디아식 전통혼례를 올렸다

술과 춤이 넘치는 잔치가 계속되고

멀리 있는 친척도 며칠을 묵었다

 

우리가 탑승한 비행기가 구름 사이를 뚫을 때

나는 수 만 피트 상공에서 남자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남자의 나라, 대한민국 서울 여의도에서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그날 윤중로에는 쌍벚나무꽃이 만개를 했고 나는 행복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반짝거리는 에나멜 구두를 신고 주단 깔린 카펫을 밟을 때

내 발목에 붉은 강물줄기가 감겼다

마흔이 넘은 신랑은 나를 돌아보고 많이 웃어 주었다

태양이 뜨거운 땅에서 온 신부, 내 이름은 싸 보파

스물 셋의 꿈이 이런 것이었든가

 

싸구려 매니큐어를 칠한 긴 손가락과 열대우림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더빙 된다

빗방울도 강물 줄기도 저 우림에서 발원하여 제 온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리

나는 행복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계간『미네르바』(2014. 봄 신작 소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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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노트

 

내 시는 기다림의 말귀다

 

유현숙

 

 

2007. 9.

서둘러 퇴근을 하고 간단한 옷차림으로 저녁 숲을 찾은 지 1년이 다 되어 간다. 그동안 대부분의 약속은 피했다. 부득이한 경우는 내 산책길로 동행을 청하기도 했다. 절집에 불이 들어오고 숲이 적막해지며 가장 고요한 저녁과 마주한다. 절 마당을 몇 번 돌고 어둠 묻어 오는 범종각 앞에 서면 풍경을 치고 온 저녁바람이 이마를 긋는다. 땡볕에 달은 길바닥에 내몰려 발목을 질퍽이며 걸었던 나를 어둡고 빈 절집 마당에 부린다. 서늘해진 이마로 지금은 시를 만나는 시간 아닌가.

 

2011. 4.

마른 뼈조각과 까만 눈빛만 쥐고, 몇 해 전 북한산 아래로 이사를 했다. 바람이 불면 비가 내리면 눈이 오면 어스름이면 그리고 눈물이 고이면 우이천변을 걷는다. 걷고 또 걷는다. 그렇게 걷다 돌아와서 진공관 앰프에 불을 키운다. 파르르 가늘게 떠는 불빛을 바라보며 나는 베토벤을 고르기도, 라흐마니노프나 엘렌 그리모의 피아노 연주를 고르기도 한다. 이렇게 바닥에서 혼자 뒹구는 것이 나의 시 쓰기가 아닐까.

 

2010. 6.

관음음향관에서 차를 대하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 어느새 십 수 년이 지났다. 혀를 궁글려 차 맛을 익히고 귀를 열어 소리를 보고(觀音) 만나는 이 행위를 나는 사치라 이름한다. 나는 자주 이 사치를 부리며 분주하게 지내 온 울퉁불퉁한 마음자리를 잠시나마 편편하게 골라본다.

오늘은 초저녁부터 4시간 동안 차만 나누었다. 사람 여럿 앉아 몇 가지의 차를 일곱 여덟 순배나 나누어 들다보니 한 밤이 다 갔다. 새벽에야 귀가하여 시 ‘殉葬’을 썼다.

한 생을 기도와 차로 지낸 조실 스님의 발을 씻겨드리면 발끝에서도 차향이 난다 했던가. 밤새운 내 몸에서도 찻내가 날까.

 

2005. 7.

비가 내리는 대청마루에 앉아 마당을 건너다본다. 뒤란에는 그늘 넓은 후박나무가 있다. 그 둥치에 한 마리 노새로 묶인 여자가, 멍든 사설과 자잘한 각주를 주절주절 매단 여자가, 등허리가 휘청 꺾인 허기진 여자가,

창 앞에 앉아 창窓을 쓴다. 서성이며 기다리며 쓴다.

절집 마당에서 기다리고 연지蓮池에서 기다리고 눈 오는 소리에 기다리고 새벽강에서 기다리고 바람소리에 기다리고 월광에 물들이며 기다린다.

내 시는 기다림이다. 그런 기다림의 말귀라 말하고 싶다.

 

 

유현숙_2003년『문학?선』으로 등단. 시집『서해와 동침하다』

 

 

 

―계간『미네르바』(2014.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