꼽추
김기택
지하도
그 낮게 구부러진 어둠에 눌러
그 노인은 언제나 보이지 않았다.
출근길
매일 그 자리 그 사람이지만
만나는 건 늘
빈 손바닥 하나, 동전 몇 개뿐이었다.
가끔 등뼈 아래 숨어 사는 작은 얼굴 하나
시멘트를 응고시키는 힘이 누르고 있는 흰 얼굴 하나
그것마저도 아예 안 보이는 날이 더 많았다
하루는 무덥고 시끄러운 정오의 길바닥에서
그 노인이 조용히 잠든 것을 보았다
등에 커다란 알을 하나 품고
그 알 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곧 껍질을 깨고 무엇이 나올 것 같아
철근 같은 등뼈가 부서지도록 기지개를 하면서
그것이 곧 일어날 것 같아
그 알이 유난히 크고 위태로워 보였다.
거대한 도시의 소음보다 더 우렁찬
숨소리 나직하게 들려오고
웅크려 알을 품고 있는 어둠 위로
종일 빛이 내리고 있었다.
(『태아의 잠』. 문학과지성사. 1991)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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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해요 동전들
김영수
그는 자갈치 해역을 지나는 한 마리 물고기
기쁜 숨을 죽이며 코앞에 있는 바닥으로
납작한 생을 천천히 젓는 저녁
아랫배 욕창을 참으며 가는 물길은
언제나 거세고 쉴 곳은 없다
바구니로 떨어지는 동전소리
진저리치듯 고개를 비틀어 올리는 것이
감사의 표시임을 사람들은 모르고 지나간다
토르소 같은 몸에 꽂히는 따가운 시선을 털며
먹이로 받는 한 푼 한 푼에 울컥 목젖이 잠긴다
오래도록 절여진 시커먼 바다는
펄떡거리는 희망 하나 키우지 못한 채
슬며시 그를 감추고
새 모퉁이를 돌고 돌지만 파장의 어둠은 그보다 앞서고
이제 더 밀어 닿을 따뜻한 연안은 없다
감추고 싶은 신음소리 하얀 비늘로 떨어지고
수북해도 바닥인 동전 몇 개 껴안고
축축한 저녁은 혼자 서성이는데
아무도 없는 얼음 창고 뒤편
잘린 손에 얼굴을 묻으러
그는 설잠을 누인다
―시집『감사해요 동전들』(詩와 에세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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