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 좋은 시 134 그리운 악마 이수익 숨겨 둔 정부(情婦) 하나 있으면 좋겠다. 몰래 나 홀로 찾아 드는 외진 골목길 끝, 그 집 불 밝은 창문 그리고 우리 둘 사이 숨막히는 암호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 아무도 눈치 못 챌 비밀 사랑, 둘만이 나눠 마시는 죄의 달디단 축배 끝에 싱그러운 젊은 심장의 피가 뛴다면! 찾아가는 발길의 고통스런 기쁨이 만나면 곧 헤어져야 할 아픔으로 끝내 우리 침묵해야 할지라도, 숨겨 둔 정부 하나 있으면 좋겠다. 머언 기다림이 하루종일 전류처럼 흘러 끝없이 나를 충전시키는 여자, 그 악마 같은 여자. (『푸른 추억의 빵』. 고려원. 1995) |
그리운 악마
이수익
숨겨 둔 정부(情婦) 하나
있으면 좋겠다.
몰래 나 홀로 찾아 드는
외진 골목길 끝, 그 집
불 밝은 창문
그리고 우리 둘 사이
숨막히는 암호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
아무도 눈치 못 챌
비밀 사랑,
둘만이 나눠 마시는 죄의 달디단
축배 끝에
싱그러운 젊은 심장의 피가 뛴다면!
찾아가는 발길의 고통스런 기쁨이
만나면 곧 헤어져야 할 아픔으로
끝내 우리
침묵해야 할지라도,
숨겨 둔 정부 하나
있으면 좋겠다.
머언 기다림이 하루종일 전류처럼 흘러
끝없이 나를 충전시키는 여자,
그 악마 같은 여자.
(『푸른 추억의 빵』. 고려원. 1995)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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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겠다, 마량에 가면
이재무
몰래 숨겨놓은 애인 데불고
소문조차 아득한 포구에 가서
한 석 달 소꿉장난 같은 살림이나 살다 왔으면,
한나절만 돌아도 동네 안팎
구구절절 훤한, 누이의 손거울 같은 마을
마량에 가서 빈둥빈둥 세월의 봉놋방에나 누워
발가락장단에 철지난 유행가나 부르며
사투리가 구수한, 갯벌 같은 여자와
옆구리 간지럼이나 실컷 태우다 왔으면,
사람들의 눈총이야 내 알 바 아니고
조석으로 부두에 나가
낚싯대는 시늉으로나 던져두고
옥빛 바다에 시든 배추 같은 삶을 절이고
절이다가 그것도 그만 신물이 나면
통통배 얻어 타고 휭, 먼 바다 돌고 왔으면,
감쪽같이 비밀 주머니 하나 꿰차고 와서
시치미 뚝 떼고 앉아
남은 뜻도 모르고 웃음 실실 흘리며
알량한 여생 거덜냈으면,
-시집『저녁 6시』(창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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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몰래
임보
남 몰래 한 사람을 가지고 싶다
짙은 눈썹에 윤기 어린 탄탄한 갈색의 피부
스물 서넛쯤의 발랄한 숙녀
그녀를 종일 생각하며 꿈을 꾸고 싶다
세상의 명성이나 보석에 아직 물들지 않고
세상도 그녀를 아직 눈독 들이지 않아 자유로운,
골목길 어느 꽃가게에 앉아 창 밖을 내다보거나
혹은 어느 은행의 창구에서 바삐 손을 움직이거나
아니면, 어느 유치원 뜰에서 애들과 유희를 하고 있어도 좋으리
장미 한 송이만 주시겠어요?
네, 하며 꽃을 싸는, 셀로판지보다 더 부드러운 그녀의 손길,
만 원만 예금해도 되겠어요?
그렇게 하세요, 미소와 함께 울리는 그녀의 낭랑한 음성,
아이들의 춤을 구경해도 괜찮겠어요?
물론이죠, 즐겁게 구경하세요, 학부모님!
장미며, 예금이며, 춤이며
그것은 한갓 구실에 지나지 않을 뿐
마음을 감추고 지켜보는 시간은 얼마나 흐뭇할까?
예쁜 시가 담긴 편지를 가끔 써서
발신인도 밝히지 않은 채 우체통에 넣어 놓고
두근거리며 밤을 설치고 싶다
편지가 도착할 때쯤을 기다렸다가
남몰래 그녀를 훔쳐보며 얼굴을 붉히고 싶다
차 한잔 함께 하실 수 있겠어요?
시간 좀 내 주실 수 있겠어요?
이런 속된 얘기는 결코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달래며
밤마다 쉬 잠들지 못하고 황홀한 내일을 꿈꾸리
내가 열일곱에 했던 그런 사랑을
고백하지 않고 혼자만 간직했던 그런 사랑을
다시 해 볼 수는 없을까?
-격월간『유심』(2012년 5-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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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김석규
술을 잘 담그는 여자 하나 있다면
아무도 모르게 딴살림 차려볼까
술 익는 냄새 온 집에 기어다니고
쌀알 동실동실 노란 동동주 한 잔
그만 취해 콧노래나 흥얼거리면서
한 사흘은 쉽게 잠에 곯아 떨어질까
구죽죽히 비라도 오시는 날은
마주앉아 화투장 내던지다가
낙장불입이라고 실랑이도 한 판
꽃이 피는지 지는지 그만 잊어볼까
이도 저도 안 되면 막판 가서는
허수룩하니 주막이라도 내어서
술상 나르는 심부름이나 해보나
얼굴이야 예쁠 것 하나 없어도
기막히게 술 잘 담그는 여자 있으면
ㅡ월간『유심』(2013년 6월호)
ㅡ시집『햇빛탁발』(푸른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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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송수권
이런 여자라면 딱 한 번만 살았으면 좋겠다
잘하는 일 하나 없는 계산도 할 줄 모르는 여자
허나, 세상을 보고 세상에 보태는 마음은
누구보다 넉넉한 여자
어디선가 숨어 내 시집 속의 책갈피를 모조리 베끼고
찔레꽃 천지인 봄 숲과 미치도록 단풍 든
가을과 내 시를 좋아한다고
내가 모르는 세상 밖에 떠들고 다니는 여자
그러면서도 부끄러워 자기 시집 하나 보내지 못한 여자
어느 날 이 세상 큰 슬픔이 찾아와 내가 필요하다면
대책없이 떠날 여자, 여자라고 말하며
'여자'란 작품 속에서만 숨어 있는 여자
이르쿠츠크와 타슈겐트를 그리워하는
정말, 그 거리 모퉁이를 걸어가며 햄버거를 씹는
전신주에 걸린 봄 구름을 멍청히 쳐다보고 서있는
이런 여자라면 딱 한 번만 살았으면 좋겠다
팔십 리 해안 절벽 변산 진달래가
산벼랑마다 드러눕는 봄날 오후에.
ㅡ시집『격포에 오면 이별이 있다』(문학의전당,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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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집 한 채
김명인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 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질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풀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 붙은 몸으로 저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넣고서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마저 허물어버린 뒤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
토방 밖에는 황토흙빛 강아지 한 마리 키우겠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아주 잊었던 연모 머리 위의 별처럼 띄워놓고
그 물색으로 마음은 비포장도로처럼 덜컹거리겠네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
매봉산 넘어 원당 지나서 두천
따라오는 등뒤의 오솔길도 아주 지우겠네
마침내 돌아서지 않겠네
―시집『물 건너는 사람』(세계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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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려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곱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고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이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지
아이들은 오소리 새끼처럼 천하게 자라고
굴속처럼 어두운 토방에 팔 괴고 누워
나 부연 들창 틈서리 푸설거리는 마른 눈이나 내다보겠네
쓴 담배나 뻑뻑 빨면서 또 한세월 보내겠네
그 여자 허리 굵어지고 울음조차 잦아들고
눈에는 파랗게 불이 올 때쯤
나 덜컥 몹쓸 병 들어 시렁 밑에 자리 보겠네
말리는 술도 숨겨 놓고 질기게 마시겠네
몇해고 애를 먹어 여자 머리 반쯤 셀 때
마침내 나 먼저 숨을 놓으면
그 여자 이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리
나 피우던 쓴 담배 따라 피우며
못 마시던 술도 배우리 욕도 배우리
이만하면 제법 속절없는 사랑 하나 안 되겠는가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시는 김명인 시인의 「너와집 한 채」가운데 한 구절에서 운을 빌려왔다.
―시집『가만히 좋아하는』*창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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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집
박미산
갈비뼈가 하나씩 부서져 내리네요
아침마다 바삭해진 창틀을 만져보아요
지난 계절보다 쇄골 뼈가 툭 불거졌네요
어느 새 처마 끝에 빈틈이 생기기 시작했나 봐요
칠만삼천 일을 기다리고 나서야
내 몸속에 살갑게 뿌리 내렸지요, 당신은
문풍지 사이로 흘러나오던
따뜻한 온기가 사라지고
푸른 송진 냄새
가시기 전에 떠났어요, 당신은
눅눅한 시간이 마루에 쌓여 있어요
웃자란 바람이, 안개가, 구름이
허물어진 담장과 내 몸을 골라 밟네요
하얀 달이 자라는 언덕에서
무작정 기다리지는 않을 거예요, 나는
화티에 불씨를 다시 묻어놓고
단단하게 잠근 쇠빗장부터 열 겁니다
나와 누워 자던 솔향기 가득한
한 시절, 당신
그립지 않은가요?
ㅡ『세계일보 신춘문예당선작』(세계일보, 2008)
ㅡ시집『루낭의 지도』(서정시학,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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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暴雪)
오탁번
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버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의 미아가 된 듯 울부짖었다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이 곡허것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시집『손님』황금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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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비
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라왔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빡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
―계간『시와시학』 (2003년 여름호)
늦게 오는 사람
이잠
오 촉짜리 전구 같은 사람을 만나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사랑을 하고 싶다
말없이 마주 앉아 쪽파를 다듬다 허리 펴고 일어나
절여 놓은 배추 뒤집으러 갔다 오는 사랑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순한 사람을 만나
모양도 뿌리도 없이 물드는 사랑을 하고 싶다
어디 있다 이제 왔냐고 손목 잡아끌어
부평초 흐르는 몸 주저앉히는 이별 없는 사랑
어리숙한 사람끼리 어깨 기대어 졸다 깨다
가물가물 밤새 켜도 닳지 않는 사랑을 하고 싶다
내가 누군지도 까먹고 삶과 죽음도 잊고
처음도 끝도 없어 더는 부족함이 없는 사랑
오 촉짜리 전구 같은 사람을 만나
뜨거워서 데일 일 없는 사랑을 하고 싶다
살아온 날들 하도 추워서 눈물로 쏟으려 할 때
더듬더듬 온기로 뎁혀 주는 사랑
—시집 『늦게 오는 사람』 (파란,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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