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진주 저물녘
허수경
기다림이사 천년 같제 날이 저물쎠라 강바람 눈에 그리메지며 귓볼 불콰하게 망경산 오르면 잇몸 드러내고 휘모리로 감겨가는 물결아 지겹도록 정이 든 고향 찾아올 이 없는 고향
문디. 같아 반푼이 같아서 기다림으로 너른 강에 불씨 재우는 남녘 가시나
주막이라도 차릴거나
승냥이와 싸우다 오 이녁들 살붙이보다 헌칠한 이녁들
거두어나지고
밤꽃처럼 후두둑 피어나지고
―시집『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실천문학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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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터의 사랑
허수경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시집『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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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취불귀
허수경
어느 해 봄 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 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 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 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만 없다
―시집『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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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가는 먼 집
허수경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 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나 벌초하려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흑……, 그러나 킥킥 당신
ㅡ시집『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 1992)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ㅡ안도현 시배달『사이버문학광장 문장』 (2007년 12월 17일)
ㅡ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31』(조선일보 연재, 2008)
ㅡ일간『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46』(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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