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읽고 -수필

난 좌파가 아니다/신현수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6. 12. 19.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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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좌파가 아니다

 

신현수

 

 

비 내리는 날

낡은 유모차에 젖은 종이 박스 두어 장 싣고 가는

노파를 봐도

이제 더 이상 가슴 아프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네온 불 휘황한 신촌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 위

온몸을 고무로 감고

사람의 숲을 뚫고 천천히 헤엄쳐 가는

장애인을 봐도

이제 더 이상 가슴 저리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천일 가까이 한뎃잠을 자며

농성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을 봐도

이제 그 이유조차 궁금하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제초제를 마시고 죽은 농민을 봐도

몸에 불 질러 죽은 농민을 봐도

아무런 마음의 동요가 없으므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난 좌파가 아니다

 

 

 

―신현수 시선집『나는 좌파가 아니다』(작은숲, 2012)

 

 

 

누가 나에게 정치의 정체성을 물으면 무어라고 해야 하나. 우파라 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좌파라고도 말을 못한다. 차라리 보수나 진보라고 물으면 대답하기 조금은 더 수월할 것 같은데 그 또한 답을 하라면 애매하기는 마찬가지다. 보수면 정치적으로도 보수여야하고 사회적, 가정적으로도 보수여야 하는데 그게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우파는 보수고 좌파는 진보라는 개념도 내게는 심드렁하다. 정치적으로는 중도에서 보면 약간 보수 쪽으로 저울이 기울고 사회와 가정에서는 진보라고 생각되는데 그것도 자칭이다. 진보라면 동성애도 용인할 수 있어야 하는데 또 그 정도는 못되는 걸 보면 뼈 속까지 진보는 못 되는가 보다.

 

진보가 좌파라면 나도 어느덧 좌파를 지난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안 보이지만 지난겨울까지만 해도 우리 동네에는 허리가 90도로 꺾인 할머니 한 분이 장갑도 안 끼고 폐지를 모으러 다니셨는데 딱히 가슴이 에리지도 않았다. 어느 노동자가 한겨울 고공크레인에 올라 백일 넘어 농성을 한다는 뉴스를 봐도 남의 얘기처럼 듣는다. 그러면서 믿지도 못할 종편의 약초나 건강에 대해 귀를 기우리며 채널을 돌리지 않는 것을 보면 스스로 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때는 어떤 사람이 쟤네들은 왜 쓸데없이 데모를 하는지 몰라 하는 말을 들을 때면 역성을 들기도 하였고 언성을 높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시위를 하다 물대포를 맞은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도 마음의 동요가 없는 것을 보면 나도 이제는 시에서처럼 좌파가 아닌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