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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희 - 아들의 방/아들의 여자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7. 5. 11.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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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방

 
정운희

 

 

문은 고통 없이 잠겨 있다

 
가장자리부터 녹슬어가는 숨결을 품고 있는지

언젠가 제 몸이 녹의 일부가 되기까지

더 많은 악몽을 배설해야 한다

 
느닷없이 선반 위 유리컵이 떨어지듯이

느닷없이 손목을 긋고 욕조에 몸을 담그듯이

그곳에서 분노와 상처를 해결하고

녹을 꽃처럼 피워내 안전하게 내부로 들어가기를

강 속 같은 몽상의 방에서 피고 지기를 여러 날

 
얼굴에 난 상처 자국을 보았다

실금 간 유리처럼

아들은 단순하리만치 무표정했다

꽃을 해결하듯 수음을 즐기고

오래도록 잠을 청하기도 했다

잠깐 흐느끼는

음악소리로 부풀려지기도 하는 방
 

문은 안으로부터 열려 있다

 
내부에서 피고 지는 파편들이

또 다시 방의 실명을 증명하듯

붉은 강 눈동자를 감았다 떴다

제 스스로 염원해 갈망하는 것이다

방문은 고정된 액자처럼 흘러가고

녹을 잠식시킨 풍경들은

제 궤도를 벗어나 조금씩 이동한다
 

날마다 팽창하는 공기 속

손이 닿으면 왈칵 안길 것 같은
 

뱉어낸 녹으로 명랑해지는 방

 

 

 
―시집『안녕, 딜레마』(푸른사상,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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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여자

 

정운희

 

 

아들의 주머니 속 여자

잘 웃는 햄스터처럼

구르는 공깃돌처럼

때론 모란꽃처럼 깊어지는 여자

 

노란 원피스의 그녀가 온다

한두 걸음 앞장 선 아들을 깃발 삼아

잡았던 손을 놓았던가

얼굴이 달아오르는 유리창

어깨를 타고 흔들리는 백

주머니 속에서 느꼈을 봉긋한 가슴

나는 떨어지는 고개를 곧추세우려 커피 잔을 들었다

 
아들은 비어 있는 내 옆자리를 지나쳐

맞은편에 나란히 앉았다

여자를 향해 조금 더 기울어져 있는 어깨

조금 더 명랑한 손가락들

알처럼 둥근 무릎

빨대를 물고 있는 구멍 속 우주처럼

 
아들의 주머니 속에서 눈을 뜨고 감는 여자

식사 중에도 길을 걷다가도

주머니 속 여자와 입 맞추며 혹은 만지작거리며

깔깔거리다가 뜨거워지다가

때론 예민해지기도 하는 즐거운 방식으로

들락거리는 곰 발바닥이 쑥쑥 자란다

 
구름의 무늬는 몇 장일까?

모래가 생성되기까지의 시간은?

 

 

 

―시집『안녕, 딜레마』(푸른사상,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