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모음 시♠비교 시♠같은 제목 시

벚꽃 시 모음 -신중철/이상윤/이규리/이면우/손순미/조명/박경희/유안나/김영태/한성례/김지녀/조명/함성호/유순예....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9. 4. 4.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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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신중철

 

 

꽃 핀 뒤에야 그대 없는 빈자리에 들어온 감기몸살이

내가 아픈 사람이라는 걸 알려 주었다

장미 울타리를 바라보는 일 하나로도

하루가 온전히 저물어 갔다

 
해마다 한 생을 감당하는 꽃이여

지금 생의 너머에서도 너는 꽃의 운명을 감당하겠느냐

꽃 그림자가 모가지를 흔들자 어둠 이전의 오후가 몰려왔다

밤은 매일 내일로 건너가지 못하는 꽃잎의 자리에서 저물었다 


꽃가지를 꺾어 선물한 일이 아프다

끊어진 목숨으로 사랑을 증명하려 하다니

결별의 징표였으면 향기로웠을까

꽃이 눈이 없는 나를 바라본다 


현생의 나를 찾아온 그대의 이별은

전생이 망설이고 거부한 약속일 수 있다고

내생에서 미리 보내온 선물일 수 있다고

낯익은 오후처럼 울고 있는 나를 보고 있다

 
꽃이여

이별을 죽이고 아픔을 죽인 어둠이 아침을 만나는 새벽

낙화 후 몇 번의 생이 또 죽음을 버렸을 터인데

미명의 그 사람을 기억하는가

내 기억을 알아보는가

 

 

 

ㅡ계간『문학들』(2014.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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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이상윤

 

 

벚꽃이, 피었다

 

16층 아파트 베란다 문 열고 내려다봐도

번쩍번쩍, 절로 눈이 부신다

영락없는 경국지색이다

 

언제 이 숨 막히는 난장을 보았는지

거룩한 하늘 길을 가던 구름이 오고 바람이 오고

해님이 오고 새가 오고,

 

땅에서는

아이들이 와서 노인들이 와서 강아지가 와서

좋아, 좋아, 놀고 있다

 

이제 막 봄의 몸속에서 뛰쳐나온

감나무 느티나무 화살나무 무궁화 쬐고만 잎들도

엄마 젖 보듯 보고 있다

 

한결같이 발가벗은 알몸이다

 

옷을 입지 않고도 부끄럽지 않은 것은

모두가, 꽃이다

 

 

-시집 하느님도 똑같다(화암,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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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아프다

 

이규리

 

 

봄이라는 조산원

애비가 누군지도 모른 채

느닷없이 임신하고 곧이어 분만했네

조산인가 봐

병원 복도 같은 군산 가도

간호사들이 뛰어가고 달려오고

종일 구급차가 지나가네

들어선 애도 떨어지겠네

숨은 애비들은 다 누구야

특수 조명 탓인가

마주치는 얼굴들 다 흰죽 같아

흐드러진 꽃 아래 이곳저곳 맘 솔기가 툭툭 터지네

옆사람

손을 잡고 풀쩍풀쩍 뛰었는데

끌어안고 어디 물컹 닿았는데

나중에 보니 모르는 사람이네

살아 반짝이는 날 며칠이냐고

내일은 내일 걱정하자고

간덩이까지 훤해지는 날

추억은 이렇게 디카 속으로

카메라폰 속으로

꽃인듯 사람인 듯 쭉쭉 빨아들이며

돌아갈 일 걱정도 않고

조산아들 종일 햇볕에 뉘어놓으며

 

 


-시집 「뒷모습 」(랜덤하우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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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벚꽃

이면우



젊은 남녀 나란히 앉은 저 벤치, 밤 벚꽃 떨어진다

떨어지는 일에 취한 듯 닥치는 대로 때리며 떨어진다
가로등 아래 얼굴 희고 입술 붉은 지금
천 년을 기다려 오소소 소름 돋는 바로 지금
몸을 때리고 마음을 때려, 문득 진저리치며 어깨를 끌어안도록
천 년을 건너온 매질처럼 소리 안 나게 밤 벚꽃 떨어진다.


ㅡ시집『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창비,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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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십리


손순미

 


십리에 걸쳐 슬픈 뱀 한 마리가
혼자서 길을 간다


희고 차가운 벚꽃의 불길이 따라간다


내가 얼마나 어두운지
내가 얼마나 더러운지 보여주려고
저 벚꽃 피었다


저 벚꽃 논다


환한 벚꽃의 어둠
벚꽃의 독설,


내가 얼마나 뜨거운지
내가 얼마나 불온한지 보여주려고
저 벚꽃 진다

 

 

 

-월간『현대시학』(2011,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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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여자

 

손순미

 

 

한 토막 평상에

엉덩이를 찍고 앉은 김씨

아코디언을 켠다

김씨의 세월이 그곳으로 다 몰려간 듯

아코디언은 주름진 몸을 펼쳤다 접었다

줄까 말까 배배 꼬는 여자처럼

풍만한 비애의 소리를 꺾어가는 중이다

 

봄이라는 게 처음부터 가려고 온 거지

캬! 소주처럼 차고 뜨거운 저 벚꽃 아래

한번쯤 강제로 눕혀보는 추억 같은 것!

 

벚꽃이 지려고 벚꽃이 피고

여자가 가려고 여자가 오고

당최 벚꽃이란 게 여자란 게

 

벚꽃은 잠깐 태어나 오래 죽어

아름다움을 괴롭히고 슬픔을 누리다 가고

아코디언 저 혼자 밤을 건너가는 소리

하! 오늘 벚꽃이 저리 분분하게 피어

어쩐지 그동안 지은 죄 탈탈 털어놓고 싶어

오지랖 떨어보지만

 

더럽게 깨끗한 척하는 저 벚꽃이란 여자

한꺼번에 그 색 다 써버려

허탈한 저 여자

너무 쉬운 저 여자

너무 뜨거운 저 여자

 


―계간『유심』(201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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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시대

 

조명

  

 

꿈같아요

 
꿈속에서 꽃꿈을 꾸는


고양이


한 무리 고양이들 사지를 쫙 펼쳐


이 의식에서 저 의식을


핥아요


제 검은 가지 끄트머리마다


꽃을 들어요


귀밑머리 구름벚꽃 꽂고 환하게 웃으며, 찰칵


잠시 잠깐 돌아온


소녀들


꽃 같아요


꽃꿈 속에서 꿈을 꾸는


프러시안블루


할머니

 

 

 

―계간『시와 표현』(201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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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문신


박경희

 

 

아버지는 이십 년 넘게 목욕탕에 간 적이 없다

아들에게 등을 맡길 만도 한데

단 한 번도 내어준 적 없다

아버지의 젊은 날이

바큇자국으로 남아 있는 한

자식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등

경운기와 사투를 벌이며

빨려 들어가는 옷자락을 얼마나 붙들었던가

논바닥에 경운기 대가리와 뒤집어졌을 때

콧구멍 벌렁거려며 밥 냄새에 까만 눈 반짝이던

삼 남매의 얼굴이 흙탕물에 뒹굴었으리라

바퀴가 등을 지나간 뒤

울지도 못하고 깨진 창문에 덧댄 비닐처럼

벌벌 떨었다

방문 틈으로 새어 나오는 앓는 소리를 들으며

개구리처럼 눈만 끔벅이다가

부엌 구석에 쪼그려 앉아 졸았다

경운기와 씨름한 샅바가 불게 물들어

아버지 등에 감겼다, 병원에 가자고

등에 손을 얹은 어머니의 눈물

뒤집어지던 꽃잎 훌러덩훌러덩

등에 새겨졌다   

 

    

 

시집벚꽃 문신(실천문학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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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벚꽃


유안나

 


자리가 비어있다

그 자리에 무엇으로 채울까

당신이 두고 간 서랍을 뒤적여본다


서랍 속엔 알약 같은 별들이 뒹굴고 있다

 
미래도 서랍처럼 살갑게 열리고

빠르게 늙어서 무엇이든 다 알았으면 좋겠다
 

어디서 오는지 모를 황사바람에 걸려 넘어지면 언덕에 앉아 울었고

노복처럼 하늘을 흘겼었다

 
빈자리가 따끔거린다

봄밤을 메우기 위해 꽃이 피어났다고 생각하며

통증을 달래야 할까

 
흉터는 이쪽과 저쪽을 가로지른다

장례식장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도 생의 구덩이를 파는 일

방패연을 놓친 아이처럼 하늘을 바라본다

날아간 연줄은 울음을 달고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다


흰 그림자에 산 벚꽃을 채워 넣어야 할 것 같다

 
하늘도 빈자리에 별을 채워 넣고 있다

나 여기 있다 하고 대답해주는 하늘을 바라본 적 있는가

 
여기 자리를 비우고 거기서 깜박이는 당신을 바라본다

 

 


-계간『시산맥』(201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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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지는 날

 

김영태

 

 

철없이 왔다가

덧없이 가버렸다

 

더 이상 화려할 수 없게

더 이상 서운할 수 없게

 

한바탕 화사한 꿈속에

어지러운 눈물의 아름다움

 

,

나의 첫사랑이 너와 같았으리!

 

 

 

시집나는 모슬포가 슬프다(한비co,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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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개한 벚꽃 아래 남근석은
 

한성례

 

 
새들의 울음소리가 하늘에 닿는 봄날 오후

대학캠퍼스의 박물관 정원

촘촘히 늘어선 석상 위로 벚꽃이 떨어져 내린다

음기가 센 땅이라 다수의 남근석을 옮겨놓았다던가

하긴 원래 여자대학이었으니

 
‘한순간’이라는 빗장이 풀린 벚꽃은

절정을 향해 숨을 몰아쉰다

 
누군가의 것을 흉내 내어 만들었을

누군가의 쾌락의 도구였을

누군가의 정염의 징표였을

남근석들이 만개한 벚꽃 아래 환하게 빛난다

일 년에 한 번뿐인 이 만끽을 위해

 
검자주색 꽃으로 뒤덮인 조릿대밭

평생에 단 한번 꽃을 피우고서

동반 자살하듯 일제히 말라죽는 키 작은 조릿대꽃

 
십 년을 넘게 자라야 꽃이 피는 용설란꽃

백 년 만에 꽃이 핀다 해서 세기의 꽃이라고도 하지만

단 한 번 꽃을 피우고선 장렬히 고사하는 키 큰 용설란꽃

 
벚꽃도 조릿대꽃도 용설란꽃도

대지를 향해 은밀히 인사를 나누고

새로이 태어날 남근을 향해 손을 흔든다

 
지금 피어난 꽃들은 다 사라지고

남근 돌비석만 남아

한참을 더 꽃잎의 진한 눈물을 받아 마실 것이다

 
수액으로 짠 주문을 외우며

가랑잎처럼 가벼운 고양이의 두개골들은

시간의 부재 대신 나뒹굴고

재생의 기회를 기다리며

먼지로 내려앉는 마른 꽃향기로 가슴을 채울 것이다

 
남근석 위로 하염없이 벚꽃이 떨어져 내린다

 

 


ㅡ계간『시와 표현』(2014.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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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벚꽃이 지기 전에

 

   김지녀  

                                           


   떠나야겠다, 몇 번의 짐을 챙기고 푸는 동안 사랑은 몸을 옮기고

   떠나야겠다, 입버릇처럼 말하던  아버지는 하얀 꽃그늘을 아주 거두어갔다

 
   무릎걸음으로 달려가지만
   당신은 저 멀리 검은 자루처럼 앉아 있네 내게 손짓을 하네 깨진 유리 같은 당신의 자리 그러니까 당신은  지나가는 휘파람이었겠지 여운처럼 남아 있는 구름이었겠지 아무리 불러도 잡히지 않는

   길 건너 나무였겠지

 
   내 안에서 앙상해진 나뭇가지
   뒤돌아보면 제자리인 꽃잎들

 
   나를 배웅하는 벚나무 저편으로
   하늘이 천천히 문을 열고 있네

 
   떠나야겠다,
   사라지는 저녁으로부터 이 넓은 꽃그늘로부터
   벚꽃이 다시 피기 전에

 

 

 

―웹진『시인광장』(2007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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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핀 술잔


함성호

 


마셔, 너 같은 년 처음 봐
이년아 치마 좀 내리고, 말끝마다
그렇지 않아요? 라는 말 좀 그만 해
내가 왜 화대 내고 네년 시중을 들어야 하는지
나도 한시름 덜려고 와서는 이게 무슨 봉변이야
미친년
나도 생이 슬퍼서 우는 놈이야
니가 작부지 내가 작부냐
술이나 쳐봐, 아까부터 자꾸 흐드러진 꽃잎만 술잔에 그득해
귀찮아 죽겠어, 입가에 묻은 꽃잎이나 털고 말해
아무 아픔도 없이 우리 그냥 위만 버렸으면
꽃 다 지면 툭툭 털고 일어나게
니는 니가 좀 따라 마셔
잔 비면 눈 똑바로 뜨고 쳐다보지 말고
술보다 독한 게 인생이라고?
뽕짝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술이나 쳐
또 봄이잖니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22』(용인신문. 2010년 1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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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정신

 

유순예

 

오래된 꽃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발음을 가진

나의 조음체가 또 기교를 부렸다

방송대 국어국문학과 선행학습을 맡은 나의 혀가

법고창신法古創新을 '벚꽃정신'으로 잘못 읽었다

 

언니, 벚꽃정신이 뭐예요

오빠, 벚꽃정신이 뭐예요

 

가족들 저녁밥상 차려주고 나온 언니꽃,

상사에게 조아렸던 머리 가눌 짬도 없이 달려온 오빠꽃,

오래된 꽃들이

'벚꽃정신'을 '법고창신'으로 바로 읽다 말고

입 속의 허연 꽃잎들을 드러내놓고

깔깔깔,

웃음꽃을 터트린다

 

오래된 꽃들이 한데 모여서 공부하는 중이었다.

시간은급류하지요,학습량은만만찮지요,발음은배배꼬이지요,요,요

벚꽃정신,벚꽃정신,벚꽃정신……오, 법고창신!  

  

 

-계간『시인정신』(2013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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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진다

 

황구하

 

 

저 검은 몸속이다

하늘로 가는 길 은밀히 뚫어 놓았나

여의주 문 물고기 한 마리

지금 막 헤엄쳐 나간 게 분명하다

시리디시린 하얀 비늘들

저리 환히 쏟아지는 걸 보면

 


 ―시집『물에 뜬 달』(시와에세이,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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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벚꽃 지다 

 

  방민호

 

 

  날이 흐리다 어제보다 흐린 오늘 꽃이 떠나고 있다 네 슬픈 눈시울처럼 붉어진 흰 꽃잎 눈보라처럼 흩날리고 있다 나 여기 레테의 강 건너 네 곁으로 왔단다 우리 함께 있는 때만이라도 즐겁기로 했었지 약속을 어긴 건 당신이에요 너는 말하는데 꽃나무는 말이 없다 책을 읽어야 겠지 상처 다스리는 법이 페이지마다 씌어 있지 아무도 찾지 않는 방에 들어가 비밀스레 나의 모더니즘을 읽는다 꽃잎처럼 흩어진 시간 끝에 선다 벼랑 끝에 바람이 분다 모름지기 생은 스러지기 전에 한 번 크게 빛나는 법 꽃잎 떠난 자리에 황토비 내리겠지 너 떠난 자리에 칠흑이 서겠지


  

 

집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실천문학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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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여자

 

정미정 

 

 

볼록볼록 돋아나는 눈물

가는 핏줄기마다 자꾸 알을 스는데

구석구석 주머니모양 자라고 있는데

젖몸살처럼 꽉 차오른

내 빗장을 열어 봐

갈비뼈 사이

쇄골 사이

막 끓인 호박죽처럼 부드럽고 뜨거운 당신

손 집어넣어 봐

연분홍 꼭지에 또옥 똑 새어나오는 핏물

미처 팔아치우지 못한 누런 결혼반지 꺼내듯

조용조용 서둘지 말고 짜 봐

남은 거라곤 눈물뿐이었는데

다 준다잖아

볼 살이 패이도록 커다랗게 웃으며 준다잖아

붉음이 농하면 마구 터져 버리나 봐

하얗게 번져

봄날 가득 햇살 환한 틀니를 드러낸

그녀 좀 봐

 


 

―계간『리토피아』(2010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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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박선주


 

벚꽃 나무는 하얗게 눈을 쓰고 있다

 

쌓인 눈은 간혹 바람에 날리고 있다

 

겨울 내내 꽃은 나무속에 숨어 있다가

 

밀어내는 힘에 못 이겨 시나브로 터져 나와

 

잎으로 혹은 꽃으로 피어나 길 밝히고 있다

 

저 엄연한 상처 혹은 주검

 

눈 녹고 나면 수태한 계절의 발자국 따라

 

이 사월도 갈 것이다

 


―계간『사람의문학』(2005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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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아래


김신용 

 

 

한낮의, 성당 마당의 벚꽃 그늘 아래

휠체어에 앉은, 요양원에서 부축받아 나온, 중풍의, 치매의 노인들이

노래자랑을 하고 있다

노래는, 반신불수의, 굳은 기억의 관절을 풀어주는 치료요법이겠지만

소풍 나온 어린아이들처럼 즐겁다. 입가에 침은 흘러내리지만

캄캄한 기억의 갈피에서 동백아가씨가 걸어나오고

불쑥, 뜬금없이 웬 기미가요까지 튀어나와, 벚꽃 그늘을, 의치의 크로마뇽인처

럼 웃게 만들지만

부풀어오른 벚꽃 그늘은, 파란만장, 무의탁의 구름처럼 떠 흐른다

 

아, 저 묘비명은 어떻게 읽어야 하나?

들판의 제비꽃이나 엉겅퀴로는 읽을 수 있으려나?

 

그러나 노래는…… 꽃그늘에 인공호흡기처럼 매달려 있어

그 인공호흡기를 떼어내면…… 한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릴 것 같아

의족을 짚은 듯 자꾸만 삐걱이는 노래 따라, 손뼉 박자를 맞추어주고

있노라면

 

세상과 불화의 이물질이 조금도 섞여 있지 않은

씨를 뿌리지 않아도 저절로 돋고 있는 듯한, 그 무균질의 웃음들이

하르르 하르르 떨어져 내려

의치의 크로마뇽인 같은 봄의 그늘에, 하얀 치아처럼 반짝인다

 

한낮의, 햇빛 환한 성당 마당의 벚꽃 그늘 아래

 



―계간『창작과비평』(2009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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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이기철


벚꽃 그늘 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놓아 보렴
입던 옷 신던 신발 벗어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앉아보렴
직업도 이름도 벗어놓고
본적도 주소도 벗어놓고
구름처럼 하이얗게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 잡힌 내일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벚꽃 그늘 아래 한 며칠
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놓아 보렴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놓고
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보렴
더 걸어야 닿는 집도
더 부서져야 완성되는 하루도
동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놓고
벚꽃 그늘처럼 청정하게 앉아보렴

그러면 용서할 것도 용서 받을 것도 없는
우리 삶
벌떼 잉잉거리는 벚꽃처럼
넉넉하고 싱싱해짐을 알 것이다
그대, 흐린 삶이 노래처럼 즐거워지길 원하거든
이미 벚꽃 스친 바람이 노래가 된
벚꽃 그늘로 오렴



시집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민음사, 20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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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늙은 벚꽃나무 


  박판석


   늙어빠져 자식도 못 볼 나이에 연분홍 처녀애들 집안 가득 불러놓고 잔치 벌이는 조용한 산등성이 길가에 선 벚꽃나무. 다 찌그러져 비 샌 헌집 한 채 조상 대대로 지켜 가면서 대롱대롱 안 방 건넌 방 마루 대청 봉당 사립 심지어 측간까지 구멍 뚫을 수 있는 곳이면 모두 다 뚫어 밤새 불 켜놓고, 퍼질러 놓은 자식들 모아 일 년에 한 번 봄이면 만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하는 이태백이보다 더 재미나게 노는 모습이 미치게 부럽다이. 온 종일 벌 나비 북치고 장구치고 야단을 떠는데, 소리치고 꼬리치며 흐르는 앞 시냇가 버들까지 합세하여 흔들어대는 모습, 깨벗고 노는 동네 아이들 꼬치 흔들리는 소리도 여기서는 잘 들린다이. 지나는 사람마다 늙은 놈 미친 놈 하면서도 엉덩이 박자 맞춰 이리 씰룩 저리 씰룩 일저리 씰룩씰룩 산화공덕 염불하며 흩날리는 바람 속에 삼천갑자 동방삭이 넘는 산 년 고개 잔치가 한창이다이. 푸른 하늘에 분홍 깃발 날리며 미치게 웃는 웃음이 호탕하다이. 길모퉁이 영감 할멈 다 불러다가 옹기종기 양지 바른 곳에 앉아 자식 자랑 하얀 머리 분홍 머리 이리저리 흔들며 바람의 머리채 끝에서 상모 돌리다 너무 돌려 고개 빠져 물에 떠서 산 소식 담아 대처에 무릉도원 알리는 주마(走馬)가 된다이.     




시집『새벽산길(월간문학.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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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무한(無限)


이영광



벚꽃 그늘에 서면, 신 벗고 건너야 할 것 같아
그늘그늘한 그늘,
이 세상은 원래 어두운 곳이었네
어두워지는 마음, 안에 엎드려
오래 제 고통의 비린내에 황홀한 뒤면
아니야, 이 세상은 이렇게 밝은 곳이었네
벚꽃 그늘이 작년의 절정을 캄캄히 찾아
다시 세상의 때를 밀어놓았네
저 희디흰 멍자국들,
이 세상에 아름다움 바치러 무릅써 나오는 것들 앞에
읍하고 싶다, 그러나
아름다움보다 무시무시한 고독이 다시 있으랴
다 알아버려서 더이상 안고 싶지 않은
사랑을 외면하듯
벚꽃잎들, 벌써 벚꽃잎들을 어딘가에 버리고 있네
미풍도 그들을 상하게 하네
그러니 유고(有故)한 세월 지나는 이여
온몸 버팅겨 간신히 홈리스를 면한 자여
느닷없이 잠실 야구장을 탈출해오는 파울 볼처럼
그대 인생을 한번쯤 빗나갔다 생각, 생각한다면
저 하얗게 끓고 있는 벚꽃 동산의 화독(花毒)에
잠시 취하는 두려움은 어떠신지?
어쩌다 이 세상에 나와 형언할 길 없는
딴 세상을 만나는 복락이, 다시 있으랴 



시집『직선 위에서 떨다(창비,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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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나무

유홍준 


 추리닝 입고 낡은 운동화 구겨 신고 마트에 갔다온다 짧은 봄날이 이렇
게 무단횡단으로 지나간다 까짓 도덕이라는 거,뭐 별 거 아니지 싶다 봄
이 지나가는 아파트 단지 만개한 벚꽃나무를 보면 나는 발로 걷어차고 싶
어진다 화르르 화르르 꽃잎들이 날린다 아름답다 무심한 발바닥도 더러
는 죄 지을 때가 있다 머리끝 생각이 어떤 경로를 따라 발바닥까지 전달되
는지......그런거 관심없다 굳이 알 필요 없다 그동안 내가 배운 것은 깡
그리 다 엉터리,그저 만개한 벚꽃나무를 보면 나는 걷어차고 싶어진다 세
일로 파는 다섯개들이 라면 한 봉지를 사서 들고 허적허적 돌아가는 길,
내 한 쪽 손잡은 딸아이가 재밌어서 즐거워 자꾸만 한 번 더 걷어차 보
라고 한다


―계간『시와시학(2006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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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벚꽃그늘에서




겨우내 벼린 음모의 칼날,
유순히 기다려온 시간의 정수리다
계절은 불시
구호 혁혁한 은백색 반란의 깃발을 꽂는다
놀란 눈들의 저 자지러지는 비명을 보아라
관념이 구체가 되는 반전의 이 극치
봄은 혁명처럼 온다

계절은, 가장 낮게 엎드린 풀 포기에서부터
철탑 위 비둘기에게까지
구분 없이 한 때의 날개옷을 입혀주지만
그것은 빛과 안개로 짜여진 환각의 베일이다
향유에 적셔낸 칼날의 저 숨은 그늘을 보라
눈부신 무질서, 실은 무서운 권태의 입구다

그만, 깜빡 항복하고픈 숨막히는 긴장
저 태깔 이 향훈의 화염 속에서
지난해의 마른 열매로 서있는 플라타너스는
戰果없는 훈장 달고 나온 무표정한 퇴역장교다



―월『현대시학(2002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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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미션


권순자


나의 뼈는 바닥으로만 뻗어가

애인에게 닿을 수 없어

하늘에 닿을 수 없어

 

뼈마디마다 녹아드는 열망

파고드는 향기를

날마다 모으고 모아

 

수많은 색깔을 상상하고 모아

허기마다 채우네

푸른 꽃물

 

겨우내 메마르고 비틀린 손발을 흔들어

깨우네

잃은 사랑에 흐느끼던 어깨를 멈추네

고통을 견뎌낸 힘줄마다 박혔던 눈물을

 빼어 모으네

 

먼지투성이 어둠속을 더듬거리며

사나운 추위의 시간을 건너

허공으로 별을 들어올리네

꿈을 들어올리네

어제의 빛나는 눈물들이

허공을 숭숭 뚫고

휘청거리던 어제를 펼치네

 

소리 없이 숨기고 걸어온

고단한 발, 부르튼 발들이

허공에 박혀 한들거리네


거친 침묵이 펼쳐지네

침묵의 향기는 달고 강하여

멀리 멀리 달리네

 

또 다른 뿌리를 낳기 위하여

날개를 준비하는 뿌리의 힘이

강하고 뜨겁네

 

부드럽고 강한 날개들

바람이 뿌리치지 못하네

중독된 손들이 뿌리의 입술에 키스하고

잉태의 순간에 동참하네

 

날아라 뿌리의 소망이여

벌들이 뿌리를 키우는 군무에 끼어드네

 

이 어지러운 맛

되살아나는 젊은 사월!

힘겨운 공포를 응시하여

달콤한 즙액으로 키우는 뿌리여

화사한 나의 뿌리여!



계간 『시산맥』 (017년 여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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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궤도


권순자


물관에 숨었던 꿈을 펼치려고

수많은 물줄기들이 점점이 나무 끝자락에

무늬 져 앉는다

 

어제의 눈물들이 송이송이 내려와 맺힌다

너에게 취하여 너에게 매달린 시간

연분홍빛들이 견디지 못하여

바람에도 쉽게 흔들린다

 

너로 목마른 나날이 열꽃으로 피어

설레는 아침마다 네 발아래 앉아

 

떨리는 봄 향기에 내 눈이 열린다

네 숨결이 벌판을 가로지르고

산비탈로 달려간다

 

빗방울처럼 흩날리는 꽃잎들

 

나를 쓸어가는 너의 힘이

여린 듯 세구나

달아나는 너의 향기를 좇아가는 나의

녹아내리는 듯 아롱거리는 가슴이여

미끄러지듯 걸어가는 봄날이여

 

봄의 독백이 짧고 아련하다

떨어지는 꽃잎들 봄의 허물들이 즐비하다

 

꽃들이 너의 목덜미를 스치고

나무 그늘로 머리칼처럼 드리워진다

초저녁 달빛에 쓸쓸한 바람을 안고

 

떨리는 꽃잎들

더 떨리는 가슴

달콤한 시간 달콤한 꽃

달콤함이 자라는 시간

 

화사하고 입술은 붉게 부풀어

꿈틀거리는 꿈,

꽃그늘 아래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고

 

다시 무덤에서 태어나

산란(産卵)하는 꿈들

 

한때의 꿈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해도

저렇게 화사하고 찬란한데

한 때 너를 강렬하게 점령하였는데

가슴을 갈라지게 하고

생의 한 귀퉁이를 젖게 하였더라도

꽃들의 달싹이는 입술이 보이지 않는가

꽃잎에 들떠서

하늘하늘 날아서 허공에 맴돈다 해도

나의 혀가 잠시 얼어붙어 고요 속에 묻힌다 해도

웅웅거리는 꽃들이 사방에 소란한데

 

일렁이는 바람이 나를 두드리고

나를 싣고 떠도는데

너의 궤도를 맴도는데.




웹진 『시인광장』 (2016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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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벚꽃 회의

  박주하

  납골당 마당에서 긴급하게 가족회의가 열렸다 부친의 유골은 2층에 봉안되었는데 자식의 뼛가루를 3층에 올리는 것은 불효라고 주장하는 유족들, 울타리 넘어 봄날의 꽃밭으로 날아간 영혼의 행적은 묘연한데 고인의 뼛가루가 남아서 여전히 식솔들을 통섭한다. 납골당의 원칙을 내미는 관리인들과 생을 졸한 순서를 따지며 핏대를 세우는 유족들의 대치가 팽팽하다 오래된 벚나무들이 인간의 별난 절차를 경청하며 잎 먼저 틔운 삶과 꽃 먼저 피운 저들의 생애를 배심한다 생사의 위계질서가 설왕설래 하는 마당에 산벚의 꽃잎들이 하얗게 흐드러지고 겹친다 죽음이란 어쩌면 지는 저 꽃잎처럼 가볍고 아름답고 무정한 일, 멀리 간 사람은 입을 잃었으니 지나가는 바람의 목이나 한번 죄어볼 뿐, 꺾이지 않는 가족이란 말이 가죽처럼 질기다 고인의 여정이 소풍처럼 즐거웠으려나, 끝나도 끝난 게 아니어서 마지못해 불멸을 생각한다



웹진『시인광장』( 2017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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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벚꽃나무가 꽃피는 밤

 

양애경  

 

 

 

괜히 신경이 서는 날

어린 벚꽃나무 한 그루를 생각한다

 

가느단 손가락 마디마다

물에 갓 씻은 銀같은,

보름날 달빛 같은 꽃봉오리를 달고

몸은 흑단빛,

 

뭉크의 <사춘기>에 그려진

이제 막 몽긋 부풀어오르기 시작한 젖가슴과

하나로 꼭 붙인 가늘고 긴 다리를 가지고

불안한 눈빛을 한 소녀

 

그 소녀

어린 벚나무 밑둥에 묻혔다

유린당하고 목 졸려 살해되어

 

하늘은 진즉 어둡고

어두운 자주색 능선 위로

봄이 올 듯

밤공기가 뿌옇게 서성이는데

 

기름진 산흙 속에서

소녀의 하얀 허벅지가 분해된다

긴 갈색 머리카락은 아직

어느 벌레도 먹지 못했다

 

괜히 자다 깨어 잠 오지 않는 밤

눈을 감으면

어린 벚꽃 봉오리에서

팝콘처럼 하얗게 하얗게

꽃잎이 밀려나오는 게 보인다

 

일시에 쏟아져 내렸다




시집 맛을 보다』(지혜,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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