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모음 시♠비교 시♠같은 제목 시

낮달 시 모음 -유치환/임영조/김명인/신광철/노명순/이규리/조재훈/장옥관/오명선/박남희/유지소/민용태...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9. 4. 5.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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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달


유치환

 


쉬이 잊으리라
그러나 잊히지 않으리라
가다오다 돌아보는 어깨 너머로
그날 밤 보다 남은 연민의 조각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어롱

 

 

 

-제4시집『청령일기 (행문사,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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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달


임영조

 


한사리 때 만나서
조금 때 떠난 여자
오늘 낮 우연히 길 가다 본다
그토록 간절히 용서를 빌어도
단하하게 등지고 떠난 여자
아직도 사무치는 원한이
서슬 푸른 비수를 겨누고 있다
-여보 그만 돌아와줘
-아이들이 애타게 기다려
-제발 집으로 돌아와줘
아무리 애원을 거듭해도
곡해를 풀지 않고 떠도는
오, 슬픈 부메랑
어느새 날카로운 손톱이
서녘 하늘 한 자락
낭자한 선혈로 적시고 있다
궁지에 몰린 자의
냉혹한 복수
오늘 낮 우연히 길가다 본다.

 

 


―임영조 시전집『그대에게 가는 길 1』(제3시집)』(천년의 시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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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달 

김명인 


산비탈 연립주택의 빈터에
서울의 살림살이가 일궈놓은
뙈기밭 한 자락
불볕 가뭄 속에 엎드려
칠순 노모가 하나절 잡초를 맨다
두고 온 곳 고향은 어딜까
아파트 굴뚝 까마득한 높이 너머
뭉게구름 속절없이 흩어지는데
살아볼수록 마음은 속타는 가뭄밭
오늘은 저 낮달로나 흘러 기진한 망향이
없는 듯 엎드려 잡초조차 시든
세월을 뽑는다



-시집『머나먼 곳 스와니』 (문학과지성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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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달


신광철


달도 그리움으로
길을 잃는다

그리움으로 길 잃은
사람 여럿 죽었다
밤새 저만 바라본 시선이 있는 걸
안다 미쳐 시선을 고정한 눈길이 있는 걸
안다 낮달이
하얗다

그리운 것들과 밤새
그 짓을 했나보다



-제4시집『늑대의 사랑』 (문학의 전당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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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달


노명순

 

 

막막한 심정으로
구름 사이를 서성인다
흐린 해가 떠올라 중천인데
밤새 곁에 있는 친구들은
새벽에 벌써 일자리를 찾아 떠났는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빈둥빈둥
놓고 있는
백수
  

 

-월간『현대시』(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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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달

이규리


무슨 단체 모임같이 수런대는 곳에서
맨 구석 자리에 앉아 보일 듯 말 듯
몇 번 웃고 마는 사람처럼

예식장에서 주례가 벗어놓고 간
흰 면장갑이거나
그 포개진 면에 잠시 머무는
미지근한 체온 같다 할까

또는, 옷장 속
슬쩍 일별만 할 뿐 입지 않는 옷들이나
그 옷 사이 근근이 남아 있는
희미한 나프탈린 냄새라 할까

어떻든
단체 사진 속 맨 뒷줄에서
얼굴 다 가려진 채
정수리와 어깨로만 파악되는
긴가민가한 이름이어도 좋겠다

있는가 하면 없고, 없는가 하면 있는
오래된 흰죽 같은


-시집『뒷모습』(랜덤하우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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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달 

전태련 


해가 신다 벗어놓고 간 빛바랜 신발이

서쪽 하늘에 버려져 있다

삼백육십오 일 너무 오래 신어 헐거워진 신발 한 짝

벗겨진 줄도 모르고 귀가가 늦어진 해는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고

개밥바라기 별 하나 밥풀처럼 붙어 있다 


―시집바람의 발자국』(문학의전당,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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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달


조재훈
 


굶다가 병들어
숨 거둔 어린 동생
빈 산 비탈에 묻고
묻힌 눈물 죄다 삭은 뒤
캥캥 여우 울음 따라
허옇게 억새꽃이 날렸다.
울음 끝에 숨죽인
울엄니 낮달이
가만히 동치미국물 한 사발 들고
열뜬 머리맡에
떠 있다.


―시집『오두막 황제』(푸른사상, 2010)
―세계일보 [시의 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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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달


  장옥관

 

 

  시집간 엄마 찾아간 철없는 딸처럼, 시누이 몰래
지전 쥐어주고 콧물 닦아주는 에미처럼
  나와서는 안 되는 대낮에
  나와 떠 있다
  떠올라서는 안 되는 얼굴이, 맑아서 보이지 않는
  얼굴이, 있어도 없는 듯 지워져야 할
  얼굴이 떠 있다
  화장 지워진 채, 마스카라가 번진 채
  여우비 그친 하늘에
  성긴 눈썹처럼, 종일 달인 곰탕 속 빼죽이 솟은
턱뼈처럼 나와 걸려 있다

 

 

 
-계간『시와시학』(2012,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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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달


오명선

 


밤을 지새고
이른 새벽 산사에 오른다


누군가 나무 물고기 두드리는 소리
안개비에 젖어
날짐승 머리를 감기고 있다


저 안개비에도 내 머리는 젖지 않는다


내 그릇에 담기지 않는, 병 깊은
낮달 같은 사랑이여

 

 


-시집『오후를 견디는 법』(한국문연,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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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달

박남희


기억의 반대쪽으로 나를 버려줘
기억이 나를 아주 잊어버리게

희미한 게 나는 좋아
빛으로 빛을 지우는 법을 알고부터
희미한 게 좋아졌어

어둠에 들어서야 내가 밝아지는
알 수 없는 나의 정체성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어

밝은 빛으로 나를 지우지만
아주 지워질 수 없는 내가 남아있다는 것이
난 너무 좋아

어둠의 눈으로 보든 빛의 눈으로 보든
나는 나니까
내 곁에 눈이 밝은 새 한 마리 띄워놓아도
나는 두렵지 않아

난 이미 광활한 우주 속에서 아주 밝은 빛을
견디고 살아남은 어둠의 사생아이니까

눈부신 빛들을 내 주위에서 지우고
그 곳에 다시 짙은 어둠을 깔아놓아도
내가 그곳에서 밝게 빛나는 것이
내 몫이 아닌 것을 이미 난 알아

빛에서든 어둠에서든 희미하든 또렷하든
변할 수 없는 것은
어떤 손이 나를 붙들고 있다는 사실이야

빛으로부터 탈출해 어둠에 들었던 나를
또 다시 빛의 손으로 잡아당기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저 손의 아이러니가 궁금해

내 모습은 비록 희미해도 지금 내 몸에는
보헤미안 랩소디가 흐르고 있어
프레디가 죽어서도 목청껏 부르던
저 공중의 노래

바람이 어디를 향하건, 그건 내게 아무 상관이 없어*
외로울 땐 빛의 반대쪽으로 나를 버려줘
어둠이 나를 아주 잊을 수 없게


* 퀸의 리드보컬 프레디 머큐리가 부른 노래 <보헤미안 렙소디>의 가사
“Any way the wind blows doesn't really matter to me”를 인용.


ㅡ격월간『시와 표현』(201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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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달


유지소

 

 

나는 거기 있었네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거기 있었네 네가 떠나간 후에도
나는 거기 있었네 거기가 거기인 줄도 모르고
 

물이 흐르면서 마르는 동안 바퀴가 구르면서 닳는 동안
지구가 돌면서 밤낮을 바꾸는 동안
그동안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는 동안
 

나는 거기 있었네 네 머리 위에
나는 거기 있었네 비가 내리는 구름 위에
나는 거기 있었네 거기라는 말보다도 한참 먼 거기에

 

 

 

-계간『시작』(201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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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달


안용태

 


지팡이 걸음으로 배꼽마당 까지 배웅 나와
문안 인사 올리고 돌아가는 막내아들 손에
무명고갱이 속주머니 뒤집어
꼬깃꼬깃 말아 쥔 쌈짓돈 감추듯 쥐어 주며
"너 형수 볼라"


살아생전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며
문안 인사 따라온 내 친구 효정이 애비가
이 광경 무심히 바라보고
왈칵, 봇물 같은 울음 내려놓고 말았지요
아들 딸 손자 손녀 문안 올 때 받아 아껴 모은
이승에서의 전 재산,
쉰이 넘은 자식을 아직도 막내라서
널 두고 우째 눈 감을꼬,
널 두고 우째, 우째 하시드니


섣달 초이례,
그리 무거운 짐 아직 벗지 못하셨는지
날도 저물기 전 낮달로 와서
메마른 감나무가지 어루만지고 있네요
 

 

 

-시집『몽돌』(학이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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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낮달

 

김종목

 

 

소리도 없이

누가 길을 가나보다

 

구름이 살그머니 옆으로 비켜서면

하얀 치맛자락 바람에 달리듯

살짝 보이는

고무신 한짝

 

소리도 없이

누가 길을 가나보다

 

꿈길을 가나보다

 

 

 

시집『이름 없는 꽃(시선사,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