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8) / 세상의 근원 - 김나영의 ‘어느 섹스에 대한 기억’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8) / 세상의 근원 - 김나영의 ‘어느 섹스에 대한 기억’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8) / 세상의 근원 - 김나영의 ‘어느 섹스에 대한 기억’
어느 섹스에 대한 기억
김나영
온 동네가 가난을 식구처럼 껴안고 살던 시절
언니와 나는 일수(日收) 심부름을 다녔다.
우리 집의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던 일수
월곡동을 지나 장위동을 거쳐 숭인동까지
카시오페이아좌처럼 뚝뚝 떨어져 있는 다섯 집을 다 돌고 나면
일수 수첩 사이에서 돈의 두께가 부풀어 오르고
내 가슴에 도장밥 빛깔의 별들이 철없이 떠올랐다.
일수 수첩 속에는 각각 다른 여러 겹의 삶들이
붉은 도장의 얼굴을 하고 칙칙하게 접혀져 있었다.
어느 날 추위를 툭툭 차며 집에 도착했을 때
‘벌써 갔다 왔니?’ 하던 엄마의 이마에 송송
맺혀 있던 땀방울과 아버지의 헝클어진 머리칼과
파도처럼 널브러진 이불, 들킨 건 나였다.
아무것도 못 본 척 문을 닫고 나오던 내 뒤통수를
쌔리며 사춘기는 내게로 다급하게 휘어들었다.
삼십대 후반의 젊은 부모에게
꼭 묶어두어도 터져 나오던,
때론 밥 생각보다 더 절박했을,
한 끼의 섹스가 가난한 이불 위에
일수 도장으로 찍혀 있던, 겨울 그 단칸방.
언니와 나는 일수 심부름을 다녔다.
-『시와 반시』(2005. 가을)
<해설>
김나영의 이 시는 그 누구라도 말하기 아주 민망한, 부모님의 섹스를 다루고 있다. 이 시를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한다면 나와 언니가 일수 심부름을 간 시간은 곧 부모님이 섹스를 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사춘기의 나는, 즉 철이 들 만큼 든 나는 어느 날 섹스의 현장을 보고서도 못 본 척한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삼십대 후반의 젊은 부모에게 “한 끼의 섹스”가 “때론 밥 생각보다 더 절박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화자의 부모는 두 딸에게 일수 받아오라고 심부름을 보낸 뒤에 단칸방에서 둘만의 시간을 가졌던가 보다. 어느 날 그 행위 직후의 현장을 목격한 일은 그 시절에야 대단히 곤혹스러운 일이었을 테지만 지금 시인은 부모님을 이해하는 입장에서 이 시를 썼다. 부모님 젊은 시절의 원초적 욕망에 대한 이해, 그것이 이 시의 주제일 것이다.
출처 : 뉴스페이퍼(http://www.news-pap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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