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25567

서귀포​ /강영은​​

서귀포 ​ 강영은 ​ ​ 서귀포에서는 누구나 섬이 된다 섶섬, 문섬, 범섬, 새섬이 배후여서 새연교 난간에 한 컷의 생을 걸어놓은 사람은 섬으로 건너가는 일몰이 된다 서귀포에서는 누구라도 길을 묻는다 바다를 향해 흘러내리는 언덕에 서서 여기가 어디냐고, 서 있는 곳을 되돌아본다 당신이 서 있는 거기서부터 서귀포는 언제나 서쪽이다 녹두죽 같이 끓는 바닷가 찻집에 앉아 노을처럼 긴 편지를 쓰면 기억만큼 고통스럽고 아름다운 것은 없다 언제쯤 당신에게 닿을 수 있을까 불붙는 해안선을 지나면 또 해안선 긴 문장이 따라오는 지상에서 가장 참혹하고 아름다운 편지를 쓰고 있다면 당신은 서귀포에 있는 것이다 떠도는 섬을 당신의 마음속에 붙잡아 앉힌 것이다 ​​ ​ ​ ㅡ시집 『산수국 통신』(황금알, 2022)

회화나무 세탁소 /이주송

회화나무 세탁소 이주송 이 골목의 그림자는 뾰족해요 밖에서 안으로 밀어내는 힘이 나뭇잎으로 자라니까요 보세요 바늘 하나로 몸의 흉터를 가려주는 사람을 여기서는 미움마저 봉할 수 있다네요 오랜 박봉으로 살아왔지만 그 사람 박봉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하네요 작업복 밑단에는 온전하지 않은 침묵이 묻어있네요 햇볕을 잘라 와 찢긴 면바지에 무늬를 새기죠 그건 바지에 눈을 달아준 것인데 아무도 모르죠 넥타이에 얼룩이 생겼어도 걱정하지 마세요 회화나무에서는 얼룩도 헹궈내는 바람이 있으니까요 오늘은 그가 여러 번 기워진 자리를 또 기워요 기운다는 일은 밤의 상처에 달과 별을 다는 것이지요 가게 문이 여닫칠 때마다 솔기 터진 인사말이 회화나무 세탁소를 여는 비밀인데요 다름질 끝날 옷에는 결을 가진 마음이 빛나죠 바람을 등..

카테고리 없음 2022.09.02

파국 직전 /김솜

파국 직전 김솜 곧 도착한다는 전갈은 독毒을 품고 있었다 움직임도 없이 움직이는 시간은 움직이는 것들을 키우고 또 가져갔다 도착이 없는 ‘곧’은 어떤 상태일까 스위치를 누르면 켜지는 전등 같은 순간 접힌 신발 뒤축 같은 설레발도 손목시계와 심장의 시계가 달라서 측정할 수 없다 마음을 따르지 않는 시간 속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온다던 너는 시침위에 앉아 있고 기다리는 나는 초침 위에서 서성였다 ‘곧‘은 시간일까 감정일까 ―『시와사람』(2022., 가을호)

어떤 무렵 /김솜

어떤 무렵 김솜 바람의 살결이 만져지는 배동바지 때 태양의 수다가 잦아진다 따듯한 구름이불 몇 채 공중에 펼쳐지면 나 꽃이오 말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 바람이 수줍은 벼꽃 속을 들춘다 조용히 격렬하게 누가 볼세라 서둘러 일을 치르는 낮거리 물방개가 봤을까 개구리도 봤겠지 꽃밥을 위해 장대 같은 미루나무 서넛 보초처럼 길가에 세워두었지 낯 뜨거운 그늘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사이 가던 길 멈추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누구도 모르는 일 이제부터 다닥다닥 벼 머리는 골똘해지겠지 부푸는 공중 아버지의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가고 그때쯤 엉덩이 펑퍼짐한 노란 주전자 논둑길 타고 흔들흔들 가까워져 온다 ―『시와사람』(2022., 가을호)

모든 육체는 다 풀이다※ ―제주샛별오름에서― / 박분필

모든 육체는 다 풀이다※ ―제주샛별오름에서― 박분필 바람과 빛의 파노라마 속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오르는 샛별오름 높은 파도가 푸른 바다를 소용돌이치듯 하얗게 펼쳐 보이는 억새꽃 물결 빛 너머에는 또 다른 빛이 있었고 바람너머에는 또 다른 바람이 있었다 포효하며 흐르는 바람강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물살이 어딘가 먼 곳으로 나를 실어 갈 것만 같아 나를 바닥에 가라앉힌다 휘파람 소리에 눈을 뜬다 휘파람의 이랑과 골에 뭉텅 뭉텅 남아있는 묵직한 통증들 온몸을 휘저어 운다 마치 잠시 눈을 감았다 뜬것처럼 또 다른 바람이 불어오면 정월대보름의 들불축제 이곳은 다 불길에 휘감길 것이고 까맣게 타버릴 것인데 죽음의 씨앗처럼 심어진 저 봉분도 싹틀 수 있을까 새롭게 피어날 날개들이 부활의 춤을 춘다 하얀 억새꽃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시인을 위한 파반느​ /유종인

아직 태어나지 않은 시인을 위한 파반느 ​ 유종인 백발의 저 노인은 백 년 전도 백발 같아 앞서 가 뒤돌아보니 자작나무 풍채인 게 거뭇한 옹이 마디에 웅숭깊은 눈을 떴네 공중의 어느 좌표에 화장실을 세워놓고 새들은 꼭 그 자리서 뒷일을 보는갑다 흰 새똥 뒤집어쓴 바위가 천년 가는 혼수(婚需)같네 잎새가 죽은 난과 새 촉이 돋는 난(蘭)은 한 바람에 다른 결로 햇빛 속을 갈마들며 터 잡은 고요의 심지에 수결(手決)하듯 꽃을 버네 남녘의 섬 한 귀퉁이 나를 번질 터가 있어 독필(禿筆)의 그 날까지 번민을 받자 하니 툇마루 볕 바른 자리에 선지(宣紙) 펴는 댓잎 소리 야자수와 소나무가 쪽동백을 아우 삼듯 까마귀와 갈매기가 청보리밭 답청하듯 숨탄것 지상의 한 걸음씩 몸을 내는 얼이 있네 ―웹진『공정한 시인의 사..

안개의 정국에서 /​김왕노

안개의 정국에서 ​ 김왕노 아직 전국은 안개의 정국입니다. 안개의 점령지라 모든 것은 초라하게 안개의 치하에 놓였습니다. 어머니! 안개 같은 꿈, 안개 꽃 한 묶음 같은 사랑, 안개 같은 그리움 어머니가 쓰셨던 아름다운 직유법이 두려워집니다. 갓 태어난 새끼를 거느린 한 무리 오리 안개의 장막에 놀라 풀밭에 가만히 엎드려 숨죽이고 있습니다. 저녁 무렵 선한 사람의 죽음을 알리던 교회 종탑도 안개에 묻혔습니다. 피하지 못하면 즐겨라 하지만 그렇지 못한 안개고 안개 속에서 종을 친다 해도 종소리마저 안개에 갇혀 산 넘고 물 건너 저 벌판의 풀잎 한 장 흔들지 못합니다. 안개 속에서 명상은 안개가 갉아먹고 안개에 젖어 형편없습니다. 어디나 안개의 정국, 소리 없는 점령군의 약탈과 수탈이 극에 달했습니다. 어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