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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나무 각시 /이연숙

미루나무 각시 이연숙 여우 꼬리만큼 작은 햇살을 품고 있는 내 등에 그녀가 내게로 와서 보드라운 체온 던지며 눈 감고 서 있다 가만히 있어도 흐르는 그녀의 슬픔이 나를 투과해 강물 위에 널어놓은 듯 물 위에 결이 생긴다 지나다 그녀는 불쑥 나를 찾곤 한다 느닷없이 불현듯 기습처럼 네가 그리웠어, 라며 허겁지겁 나를 안는다 어느 추운 겨울날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나를 찾아온 적도 있다 강둑에 선 친구들이 와 와하며 떠내려가는 유빙(流氷)에 소란스러울 적에도 마치 혼자 온 것처럼 저만치 서 있었다 잎 달고 잎 떨구고 잎 달고 잎 떨구고 그렇게 나 홀로 세월을 펄럭일 동안에도 그녀의 눈길은 늘 저 어디쯤 빈 곳을 보고 있다 차라리 그녀 내 곁 한 그루 나무로 세워졌으면 ―『시와소금』(2023, 봄호)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 ― 내게 사랑이 있었네① /오태환​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 ― 내게 사랑이 있었네① 오태환 ​ 내게 사랑이 있었네 봄이 와서 허천나게 꽃이 피면, 벌서듯이 서서 그대를 생각하는, 수척한 사랑이 있었네 ​ 종아리를 걷고, 허천나게 꽃이 피면 꽃으로 매 맞고 싶은 사랑이 있었네 꽃으로, 꽃째로 매 맞으며 환하게, 아프게 그대 쪽으로 새는 마음이 있었네 봄이 와서 허천나게 꽃이 피어서, 한사코 그대 쪽으로 새는 몸이 있었네 내게 그대 쪽으로, 수척하게 새기만 하는 슬픈 몸이 있었네 ​ ―시집『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황금알, 2019)

할 말은 많으나 이만 줄입니다 /원춘옥

할 말은 많으나 이만 줄입니다 원춘옥 밥상에 앉은 다혈질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숨 죽은 콩나물처럼, 시금치처럼 여자는 “할 말은 많으나 이만 줄임”이라고 눈으로 쓴다 밥상에 앉은 남자가 여자를 쏘아본다 여자는 묵묵히 사골 찜솥을 준비한다 이 국물만 고아 내면 서로의 간도 맞는 맞춤형이 되겠지 남자는 양푼 가득 마늘을 담아와 까기 시작한다 매운 냄새가 서로의 관계처럼 자극한다 남자도 “할 말은 많으나 이만 줄임” 집안 분위기로 쓴다 누가 초식형이었는지 누가 육식형이었는지 알 수 없는 두 사람 사이에는 깐 마늘만 수북이 쌓여있는 ―시집「할 말은 많으나 이만 줄입니다」(상상인,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