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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오빠 /이연숙

큰오빠 이연숙 낮에 돼지죽 좀 주니라 아버지 장에 가시던 날 큰오빠 펄펄 끓는 물 줘서 돼지 다 죽었다지 포도나무에 거름 좀 주라하면 똥바가지 나르다 엇박자에 휘청 똥물 다 뒤집어 썼다지 도리깨로 콩 털라 하면 도리깨 맴맴 돌아 얼굴 찢겨 병원 가 꼬맸다지 그러면서도 겁은 또 겁나 많아 자는 여동생 깨워 뒷간에 세웠다지 갈래머리 동생 생일에 극장 구경 시켜 주마고 버스타고 한 시간 송림동 현대극장 데려가더니 자봐라 극장이다 극장 간판만 보여주고 다시 집에 왔다지 오빠야 생일 축하해 울 큰오빠 환갑 되었네 생일 선물로 동상이 극장 보여줄까 현대극장 그냥 있던데 ―『시와소금』(2023, 봄호)

여우 /류인서

여우 류인서 재 하나 넘을 적마다 꼬리 하나씩 새로 돋던 때 나는 꼬리를 팔아 낮과 밤을 사고 싶었다 꼬리에 해와 달을 매달아 지치도록 끌고 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꽃을 샀다 새를 샀다 수수께끼 같은 스무고개 중턱에 닿아 더이상 내게 팔아먹을 꼬리가 남아 있지 않았을 때 나는 돋지 않는 마지막 꼬리를 흥정해 치마와 신발을 샀다 피 묻은 꼬리 끝을 치마 아래 감췄다 시장통 난전판에 핀 내 아홉 꼬리 어지러운 춤사위나 보 라지 꼬리 끝에서 절걱대는 얼음 별 얼음 달이나 보라지 나를 훔쳐 나를 사는 꼬리는 어느새 잡히지 않는 나의 도둑 당신에게 잘라준 내 예쁜 꼬리 하나는 그녀 가방의 열쇠고리 장식으로 매달려 있다 ―시집『여우』(문학동네, 2023)

의자 /이돈형

의자 이돈형 헌 집 같은 의자에 앉아 헌 집에 든 바람 같은 아버지가 담배를 태우신다 어쩌다 또 한 대 태우신다 공복에 태우는 담배 맛은 정든 소멸처럼 애태움을 가시게 해 내뿜는 연기가 생의 뒷주머니 같은 골목에 퍼지다 종일 담벼락을 옮겨 다니며 중얼거린 의자의 그림자에 가 앉는다 어쩌다 하루란 게 있어 의자는 허虛의 혈穴을 찾아 하루치 삭고 아버지는 하루치 삶을 개어놓는다 어둑한 골목의 기색을 덮고 있는 두 그림자 위로 석양이 쇳물처럼 쏟아진다 아무데서나 문드러지기 좋은 저녁 아버지 의자에 앉아 소멸만 내뿜는다 내뿜어도 자꾸 생을 일러바치듯 달라붙는 정든 소멸은 무얼까? 아버지, 담배 맛이 그리 좋아요? ㅡ반년간 《상상인》(2023, 1월), 제3회 선경문학상 수상작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