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25567

서쪽 /서주영

서쪽 서주영 저무는 것들처럼 당신의 등도 서쪽으로 굽어 있다 하루하루의 눈동자와 저녁의 어깨 위에 슬픔을 으깨어 얹은 당신이 앉아 있다 저문다는 건 바람에 긴 그림자가 힘없이 흔들리는 것 그리움이 옅어지고, 계절이 쓸쓸해지고 철저히 혼자가 되는 것 저녁이 내려앉은 굽은 각도에서, 펼 수 없는 서쪽 모서리에서 당신과 나의 지난 시간이 염분처럼 버석거린다 저문다는 것은 서쪽으로 애증의 질문을 던진다는 것 등이 굽은 당신의 그림자를 껴안고 다독인다는 것 ―『월간문학』(2022, 11월호)

지나고 보니 /정옥임

지나고 보니 정옥임 살면서 할 말들을 어떻게 다 하고 사니 침 넘기듯 할 때가 많다던 어머니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해도 탈거지 많다고 저마다 생김들과 마음들이 다름이니 단말과 쓴말들을 너무 쉽게 하지 마라 손해가 되는 듯해도 끄덕끄덕 넘어가고 내 생각이 분명히 옳은 것만 같아도 입장 바꿔 잠시만 생각하는 마음으로 지혜를 펼치는 것이 편할 때가 많더라 할 말은 해야지 그런 게 어디 있어! 벌 쏘듯 어머니에게 해부쳤던 많은 말들 이만큼 살아본 세월 이제서야 그 뜻을 ― 『월간문학』)2022, 11월호)

나는 나를 쉽게 미화한다 /정국희

나는 나를 쉽게 미화한다 정국희 괜히 약속을 깼다 그리고 낮잠을 잤다 나쁜 꿈으로 머리가 젖었다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면서 뉘른베르크를 생각했다 머리를 말리다 말고 젖은 머리로 집을 나섰다 길을 따라서 그냥 걸었다 집집마다 잔디의 길이가 똑같아서 쓸쓸했다 쓸쓸해서 몸을 똑바로 세우고 나를 궁리하며 걸었다 피아노를 칠 줄 모르는 나는 음계부터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손가락 놀림이 더딘데다 눈썰미까지 없어 배우는 것에 느려도 줄기차게 연습하면 못할 것도 없지 블루베리를 먹는 꿈이 아니고 슈바인스학세를 먹는 꿈도 아니었다 썰물 빠진 바다를 걷다가 돌아보니 밀물이 밀려와 길이 막혀버린 꿈 육지가 저 멀리 보이고 숨이 막혀오고 내 머리로 죽음이 쏟아지던 꿈이었다 어느 집에선가 풍겨오는 브뢰첸 빵 냄새가 젖은 머리를..

저수지에 걸려든 낮달 /이윤소

저수지에 걸려든 낮달 이윤소 저수지 한편 덩그마니 서 있는 버드나무, 갓 돋아난 꽃망울이 미끼일까 회창회창 휜 가지를 물속에 드리우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입질이 오지 않는다 빛을 끌어 와 가지 끝에 모으고 물결을 따라 찰랑거려도 수면 위로 새 한 마리 스치며 날아가버린다 바람이 잦아들고 버드나무 밑 그림자가 햇살에 졸다가 정오의 정수리를 벗어날 즈음 기슭의 물결도 삐걱거린다 물이랑이 천천히 우측을 통과할 때 팔딱거리는 입질 하나, 바람이 냉큼 낚아챈다 제 몸을 터는 물방울 봄날의 정적에 걸려들었다 살림망 같은 구름 속에는 낮달 한 마리 걸려 있다 ―시집 『고요한 물음표』(현대시학, 2022)

아무나 /이희정

아무나 이희정 캔디 양은 이제 아무나가 아니라서요 격 있는 텍스트로 진입이 가능하지만 사탕은 누구나라서 입장이 난처하다고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한 기호의 입 아무나 안 된다며 누구나를 거절하는 기표와 기의 사이에 맥락은 구조적인데 캔디와 사탕 사이 인과관계란 없다 사탕 양도 캔디 양도 함량은 매한가지 아닌 척 사탕발림해도 누구나는 안 되는 ㅡ 『시와소금』(2022, 겨울호)

겨울의 기억 / 조헌주

겨울의 기억 조헌주 겨울에는 선線들만이 살아남는다. 황태 덕장에 내어걸린 겨울은 한여름 찌운 잉여의 살들을 마른 바람이 새긴 결 따라 살뜰히도 뾰족하니 잘도 빼내어 말렸구나. 시냇길 옆으로 난 마을 길 따라 듬성듬성 난 바람결 따라 녹이 슨 대문들 지나 메마른 형태들로 흩어놓은 쓸쓸한 겨울의 추상抽象을 본다. 닫힌 대문 밖에 내어놓은 아이처럼 이름 모를 화분 하나 풀이 죽어 놓여있고 풍성한 잎새에 가려 한여름엔 보이지 않던 고단하게 늘어진 전깃줄이 전봇대를 힘겹게 부여잡았다. 빨랫줄에 널린 몇 마리 참새들 바람에 일렁이며 외로이 펄럭일 때 높은 나무 덩그러니 심장처럼 박힌 까치집은 언제나 겨울엔 더 커져 있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 동심 묻은 앳된 낙서가 폐가에 어울리지 않게 아직은 햇살 받아 따사로..

병을 나눠 먹는 순두부 /천수호

병을 나눠 먹는 순두부 천수호 함께 순두부를 먹는 날이었다 순한 것이 우리를 수그리게 했고 뜨거운 것이 우리를 망설이게 했다 식당에는 순두부와 아무 관계가 없는 청국장 냄새가 진동을 하고 냄새까지 순해진 뚝배기를 앞에 놓고 둘은 숟가락을 넣었다 뺐다 했다 폐질환을 나눌까요 간질환을 나눌까요 가능한 많은 병을 나누고 싶어요 그렇게 다정해도 우리는 한 가정을 이루지 못했고 병명도 주고받지 못했다 주소는 달랐지만 통증을 나누기엔 적절한 사이 몇 개의 병을 예약하고 우리는 좀더 정중히 순두부를 퍼먹었다 뚝배기가 받는 절은 어떤 기원처럼 병을 잘 스미게 했다 ―시집『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문학동네. 2020)

버드 스트라이크* /우남정

버드 스트라이크* 우남정 철새들이 돌아온다 유리에 빗살무늬가 생긴다 작은 몸 어디에 항로가 그려져 있을까 잃어버린 길 혼자 지나가고 철새도래지에서 AI가 검출됐다는, 삼 킬로미터 내의 닭과 오리들이 매몰되었다는 뉴스가 뜬다 비행기 한 대 날아오른다 아파트들이 전광석화처럼 깜박이며 새를 쫒고 있다 불현, 섬망처럼 날아오르는 새 떼들 몇몇은 비행기에 부딪치고 어쩌다 엔진 속으로 빨려 들어간 몇은 어마어마한 비행기 동체를 옥수수 밭에 불시착시켰다 어머니는 내게 물으셨다 ‘아주머니는 누구세요’ 어머니의 꺼진 엔진 속에서 어린 청둥오리 끼룩 끼루룩 우는 소리가 들렸다 * 비행기가 조류와 충돌해서 일어나는 사고 ㅡ시집『뱀파이어의 봄』(천년의시작,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