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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에 바치는 노래 /김왕노

침묵에 바치는 노래 김왕노 바람 너머 중앙고원에서 곁에 없는 네 생각에 안겨 사는 동안 차가운 조약돌 같은 나는 가끔 죽은 별이 다시 빛나듯 즐겁기도 했으니 내 마음은 해갈이 했다가 다시 피는 꽃나무 같았으니 슬픈 추억이 나를 깨워 앉혀도 바다로 가는 길이 멀어도 백년 묵은 쓸쓸함이 거대한 지네나 독을 뿜는 두꺼비 같이 돌아와도 침묵의 시위를 하는 중앙고원의 새와 꽃과 짐승의 마른 똥 타는 냄새에게 아무렇지 않은 듯 불러주는 노래, 침묵에 바치는 노래 중앙고원에 야크가 울면 나는 그간 팽개쳐둔 먼 이름을 그리워해야 한다. 유목 같이 사랑을 기르려고 떠돌아야 한다. 내 그리움의 연쇄반응으로 다시 시작되는 너를 향한 그리움 다시 시작하는 사랑, 빗장을 활짝 열어젖혀 다시 부를 푸른 휘파람 그것은 우리가 그리..

10월도 중순을 넘어섰다 /유승도

10월도 중순을 넘어섰다 유승도 베어서 눕혀놓은 들깨를 털려고 밭으로 나갔다가 푸릇한 기운이 가시지 않은 꼬투리가 눈에 거슬려 발길을 돌렸다 채 익지도 않은 감을 쪼아 먹는 물까치들을 ‘훠이’ 쫓았으나 날아가지 않는 놈들이 있어 돌멩이를 주워 던졌다 그래도 날아가지 않는 녀석이 있어 한 번 더 던졌다 비가 온다더니 흐릿한 날이 저녁까지 이어졌다 풀을 먹으라고 흑염소 네 마리를 풀어놓으니 밭으로 가서 눕혀진 들깨를 질겅질겅 밟고 돌아다닌다 소리를 쳤으나 녀석들도 들은 둥 만 둥이다 돌을 던지니 염소는 맞지 않고 깨가 털리는 소리가 난다 염소들이 놀랐는지 와다다닥 들깨를 밟아대며 우리 쪽으로 달아난다 ―『시와소금』(2022, 겨울호)

지난가을 /유승도

지난가을 유승도 겨울이 밀려온 언덕에 서니 지난가을 길가에서 듣던 울음소리가 들린다 적막한 산길 모퉁이에서 제 몸을 비벼 울긋불긋한 소리를 내놓던 여치 나뭇잎 하나 흔들리지 않는데, 혹여 자신이 바람을 일으키진 않을까 조심조심 숲을 울리던 소리 얼굴을 할퀴며 지나가는 겨울바람 소리를 가라앉히며 들려온다 ―『시와소금』(2022, 겨울호)

마정리 집 /김완하

마정리 집 김완하 엎드려 숙제를 하는 창가에 풍뎅이 한 마리 붕붕거렸다 호박 꽃잎마다 벌이 잉잉대며 날았다 담장에 매달린 조롱박에 고추잠자리 앉았다 떴다 길가 웅덩이에는 방개가 종종거렸다 둠벙의 잔잔히 이는 물살 주위를 구름이 에워쌌다 바람은 자주 강아지풀의 콧등을 훔치고 갔다 밤이 되면 목마른 별들이 쏟아져 내려와, 두레박으로 우물 길어 목을 축이고 올라갔다 등을 밝히면 담장의 나무들이 다가와 둘러앉았다 새벽까지 풀벌레들 책을 읽으며 꿈을 키웠다 우리 집은 언제나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집『마정리 집』(천년의시작, 2022)

앞산에 걸린 달 ―김환기 고택에서 /김임순

앞산에 걸린 달 ―김환기 고택에서 김임순 청마루 앉고 보니 주인인 듯 편안한 산 나지막한 반달 능선 초록 물감 번진다 그림자 서성이는 건 여태 남은 숨결이다 방문은 열려 있어도 닫을 사람 없는 집 세월 속 달이 지듯 사람도 달 속에 지고 저 산은 그리움 다 품고 무슨 생각하는가 광목을 맨 캔퍼스에 스스로 붓을 든 산 점 점으로 피워 낸 하늘 산천 달과 구름 새벽별 별똥별이 되는 너와 나의 푸른 우주 ―『시와소금』 (2022, 가을호)

하루 /김완하

하루 김완하 마음이 꽉 막히고 생각이 트이지 않는 날 태안 천리포수목원에 가서 지천의 나무와 꽃 이름 하나하나 불러 본다 큰잎꽝꽝나무 가죽잎덜꿩나무 왕매발톱나무 무늬줄사철나무 매화오리나무 구슬댕댕이 깽깽이풀 노루발톱 팔손이 물싸리 노루오줌 숲에는 온통 초록 물결 일렁이고 바다 심장에 닿아 뼈 속 깊이 젖어 온다 ―시집『마정리 집』(천년의시작,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