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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미가 그을었다 /황순희

아가미가 그을었다 황순희 전어 떼 찰방이자 은별이 몸을 떤다 돌아갈 바닷길은 하마나 아득하고 후덜덜 놀란 가슴에 아가미가 그을었다 ​ 5촉 등만 깜빡이는 봄이 아픈 춘자 이모 똬리 튼 파킨슨은 벽 오르는 담쟁이다 날마다 제자리걸음 길은 거기 멈췄고 ​ 수족관 유리벽에 길 잃은 지느러미 출구가 어디인지 돌아가도 막다른 곳 잘려진 손톱 조각으로 추락하는 별을 센다 ―『아가미가 그을었다』(책만드는집, 2022)

애인의 구성요소 /신정민

애인의 구성요소 신정민​ 내 애인은 개를 익사시키기에 충분한 물 35 리터와 찻잔 일곱 개를 채울만한 당분 그리고 비누 일곱 장을 만들 수 있는 지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중간 크기의 못 하나 만들 수 있는 철과 작은 닭장 울타리 하나 칠할 수 있는 석회 그리고 이천 이백 개 성냥개비를 만들거나 혹은 성가신 벼룩 피할 수 있을 만큼의 유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콩 한 줌 살 만큼의 금과 한적한 시골 마을 비추기에 필요한 인광 그리고 소 한 마리 죽일 정도의 독과 셔츠 하나 빨 수 있을 정도의 칼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내 애인이 매일 아침 챙겨 먹는 소량의 미네랄은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할 사랑을 위해 보충하는 것, 그밖에도 비밀이랄 것도 없는 제 애인의 신상에 대해 보다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시다면 수..

압화壓花 /마경덕

압화壓花 마경덕 매몰된 가을이 발견되었다 책을 끼고 그곳을 지나갔을 때 유난히 뺨이 붉은 꽃이 틈으로 뛰어들고 45쪽과 46쪽은 닫혔다 붉은 물을 토하며 서서히 종이처럼 얇아지는 동안 책은 책 밑에서 피를 말리고 계절이 계절을 덮치듯이 시간의 두께와 어둠에 기억은 갇혀 있었다 방치된 것들은 대부분 변형을 일으킨다 책갈피 사이 책의 생각과 엉겨있는 꽃의 얼굴 꽃들이 선호하는 죽음은 태어난 자리에서 치르는 풍장이다 압사壓死를 두려워하는 꽃들 한 권의 책으로도 죽일 수 있는 게 많다 ―시집『악어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밤』(상상인, 2022)

죽변도서관 /김명인

죽변도서관 김명인 책 만 권을 한꺼번에 펼친 바다가 기슭의 파란까지 덮어버렸으니 일몰 이후에나 대출된다는 밤바다는 평생을 새겨도 독해 버거운 비장의 어둠일까, 이 도서관의 장서려니 갈피나 지피려고 주경야독한다는 어부들의 말이 비로소 실감이 난다 일생을 기대 읽는 창窓이야 시인의 일과처럼 갈짓자 행보지만 알다가도 모를 달빛을 지표 삼아 어둠으로 안내하는 사서의 직업이란 그다지 참견할 일이 못 된다 다만 그 일로 한두 시간 끙끙거리려고 삐꺽대는 목조계단을 밟고 오른다 이 도서관이 대출하는 장서라면 파도 한 단락조차 내게는 벅찰 것이니 오늘 밤에도 누군가는 등대를 켜고 앉아 첩첩 어둠을 읽고 있겠다! ―『현대시』(2022, 10월호)

안착 /이주송

안착 이주송 ​ 철퍼덕, 주저앉은 한 무더기의 소똥 이렇게 아름다운 안착이 있을까요 ​소의 근력으로 초록을 모두 탕진한 소용을 다 바치고 난 뒤의 표정 제가 가진 본성과 중력이 가장 평온한 모습으로 내려앉은 착지 ​모든 힘이 털렁 빠져나온 저 똥에는 초식의 감정과 순경順境이 있습니다 막 도착한 순하디순한 온기에는 풀 속에 밴 이슬도 살아 있어 김이 사리질 때까지 경건해집니다 ​자욱한 안개가 쟁기와 보습을 끌고 어기적어기적 새벽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산밭이 꺼벅거리며 축축한 등을 내밉니다 ​소는 거친 콧김을 내뿜다가 꼬리 흔들어 고요를 쫓습니다 주인은 워워 한 박자 쉬며 언덕 아래 풍경을 되새김합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연꽃 송이 같은 소똥 좌선을 다 끝내고 나면 한 움큼의 풀씨 경전이 되겠지요 ―시집『식물..

식물성 피 /이주송

식물성 피 이주송 버려진 차의 기름통에선 몇 리터의 은하수가 똑똑 새어 나왔다 빗물 고인 웅덩이로 흘러 들어가 한낮의 오로라를 풀어 놓았다 그러는 사이 플라타너스 잎들이 노후된 보닛을 대신하려는 듯 너푼너푼 떨어져 덮어 주었다 칡넝쿨은 바퀴를 바닥에 단단히 얽어매고 튼실한 혈관으로 땅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햇빛과 바람, 풀벌레와 별빛이 수시로 깨진 차창으로 드나들었다 고라니가 덤불을 헤쳐 놓으면 그 안에서 꽃의 시동이 부드럽게 걸렸다 저 차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 식물성 공업사에 수리를 맡긴 것이다 그래서 소음과 매연과 과속으로 탁해진 그동안의 피를 은밀히 채혈하고 자연수리법으로 고치는 중이다 풀잎 머금은 이슬로 투석마저 끝마치면 아주 느린 속도로 뿌리가 생기고 언젠가는 차의 이곳저곳에 새들도 합승해, 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