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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이삼현

밥 이삼현 십여 년째 골방에 갇혀 웅크리던 독거가 만근의 짐을 부려놓았다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다가 넘어진 성자처럼 일요일 아침 교회 가던 길에 쓰러져 짐이 되었다 일곱 남매를 낳아 길렀지만 하루건너 사거리 동네 의원(醫院)을 전전하며 불던 삭풍이었다 멀어져 가는 천 길 어둠 속 끈이 풀린 손발을 축 늘어뜨린 채 5촉짜리 정신줄만 남아 깜박거리는데 맏이가 맡아야 한다 막둥이 집으로 옮겨야 한다 멀어도 셋째 딸네가 편할지 모른다 가까운 둘째 딸이 모셔야 한다 한동안 축구공이 되어 이리 차이고 저리 치이며 굴러다니다가 겨우 하룻밤 맏아들 침대에 누운 지린내를 피해 흩어진 자식들 짐은 두 팔을 벌려 안아 주었지만 품이 없는 자식들은 서로 밀어내기에 바빴다 동트자마자 맏며느리 자동차 뒷자리에 실려 요..

초승밥 /홍경나

초승밥 홍경나 사랑할아버지 저녁밥상에 남긴 밥 초승달을 닮아 초승밥입니다 진지를 자실 때면 흰 종지에 담긴 지렁부터 먼저 뜨던 사랑할아버지는 입맛이 없다시며 어흠어흠 늘상 밥을 남기십니다 사각반 위의 알찜이며 생치生雉적 북어보푸라기 맛난 반찬은 저분을 대는 둥 마는 둥 웁쌀 얹어 안친 뚜껑밥 아시푼 흰 입쌀밥을 너덧 술 남겨 꼭 체면을 하십니다 수저를 상에 내려놓고 보리숭늉으로 볼가심을 하고는 일찌감치 상을 물리십니다 사랑할아버지 진짓상은 이제 내 차집니다 밥물 넘어 들어간 호로록 알찜도 녹진녹진 구운 생치적도 포실포실 북어 보푸라기도 주발 맨 바닥 초승달같이 뜬 밝은 입쌀밥도 내 차집니다 시월 초이레는 사랑할아버지의 기일입니다 하늘귀엔 사랑할아버지가 밥상 물림 하던 입쌀밥 같은 초이레 달이 떴습니다 초..

잡초 출석부 /박홍재

잡초 출석부 박홍재 우리 집 남새밭에 참깨잎 고구마 잎 채소잎 잘 크는지 눈도장 쿡 찍는다 잡초는 명단에 없다 자우룩이 줄 서 있네 이름도 모르는데 얼굴 든 낯선 풀들 몇몇은 퇴짜 놓아 안 올 줄 알았는데 무성한 잡초들끼리 스크럼을 짜고 섰다 얼마나 서러웠으면 곁들여 살아보려고 뽑아도 뽑아내도 기어코 비집고 와 뿌려준 영양분 거름 얻어먹고 싶을까? ―『나래시조』(2022. 가을호)

비워둔 괄호 속 /김만옥

비워둔 괄호 속 김만옥 꺾어진 골목길을 헤쳐 온 많은 날들 두려움 같은 것은 잊은 줄 알았는데 빛 번쩍 천둥소리에 돌아보는 내 자신 내가 날 잦는 것은 새롭게 철이 드는 비워둔 괄호 속에 영혼을 채우는 일 메마른 삶의 흔적이 그리움을 낳는다 차갑고 맑은 물에 두 발을 담가본다 아픔이 없었다면 몰랐을 일상의 행복 맘 편히 제자리 찾는 순례길이 가볍다 ―시조집『길 위에서 노래하다』(예인, 2022)

가을들 /김령

가을들 김령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지난 일 년간 널 아프게 한 거 미안해 너의 꿈을 꼭 이루길 바랄게 낡은 시집 사이에서 낙엽처럼 엽서가 떨어진다 도대체 나는 이 글을 누구에게 썼던 걸까 어느 밤에 나는 부치지 못한 편지를 썼던 걸까 그 많은 밤들과 골목들, 불이 꺼지지 않던 창 어떤 기억은 습자지처럼 얇아서 들어 올릴 수도 없다 구르는 술병과 담벼락에 기댄 비틀거리는 그림자와 어제 먹은 것들을 오늘 토해내던 잔디밭과 자췻집 툇마루에 놓여 있던 하얀 편지 봉투, 멀리 떠나온 도시에서 고향의 동생에게 당부하던 깨알 같은 글자들 어느 장마철 넘실거리는 냇물 위 떠내려간 새 신발 한 짝, 달밤이면 온 동네 아이들이 뛰어나와 엉켰다 떨어지던 그림자들 기억들은 바싹 말라 부스러지기 쉽지, 내가 체감하는 시간은 너..

돌멩이의 노래 /염혜순

돌멩이의 노래 염혜순 개울물이 돌 틈을 지날 때면 목소리가 한층 높아지지 모래밭을 지날 때나 풀뿌리를 스칠 때의 소리가 아니야 그건 돌멩이와 함께 부르는 또 다른 합창인 거지 고요하던 물이 돌멩이 표면을 스치며 흐를 때면 돌 하나하나 마다 그 음이 달라 어느 돌은 매끈하고 동글동글 어떤 건 깨어지고 날카로워 아파서 구르지도 못하고 모래 틈에 박혀 신음하거든 깨어지고 구르며 돌들도 노래를 쓰는 거야 그 몸 전체로 저 소리가 노래인지 울음인지 때론 알 수가 없지 개울가에서 들리는 소리는 돌멩이의 노래를 흐르는 물이 따라 부르는 거야 시간도 그런가봐 사람 하나하나 지나쳐 흐르며 부딪히는 사람마다 다른 소리가 나는 것을 시간이 흘러가는 곳에 구르는 돌 같은 나는 무슨 음을 낼까 개울가에 앉으면 물소리에 내 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