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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근법 배우는 시간 /송진권

원근법 배우는 시간 송진권 빼빼 마른 여자가 바닥에 화구를 펼쳐놓고 앉아 있는 집입니다 모르는 돌과 꽃에서 뽑아낸 안료를 색색으로 펼쳐놓고 여자는 처음 보는 새 한 마리를 그려냅니다 한 마리 한 마리가 포개지고 겹쳐집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새떼입니다 몇 마리나 되겠느냐고 여자는 묻습니다 대답을 못 합니다 덧칠한 그림 위에 또 덧칠된 새들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자는 천천히 화구를 걷습니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옵니다 방 안은 깃 치는 소리 지저귀는 소리로 시끄럽습니다 마당을 지나 대문을 나옵니다 구름들 지붕들이 쏜살같이 그 집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대문이 닫히는 소리 새들이 파닥이며 날아오르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습니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모릅니다 왜 그 새떼가 ..

춘분(春分) /송진권

춘분(春分) 송진권 하이타이 듬뿍 풀어 이불 빨래 다라이에 담가놓고 버글버글 일어난 거품들 둥둥 떠다니던 날 젖먹이 엄마가 포대기 해 아기 업고 놀러 온 동네 꼬맹이들까지 둥둥 걷어붙이고 맨발로 빨래를 밟으며 온 동네 떠나가라 웃던 날 저는 못 하게 한다고 입이 닷발이나 나온 막내가 바지랑대 함부로 걷어차 빨래에 흙이 잔뜩 묻은 날 더러 마른 기저귀들은 바람에 날아가 달이산 자락에 척척 연 걸리듯 걸려 산벚꽃 펑펑 터지던 날 온 동네 흥성흥성 일어나던 날 펌프 우물도 쿨렁쿨렁 웃음을 흘리던 날 온 산에 버글버글 하이타이 풀어놓아 퍽퍽 치대고 말끔히 헹궈 탈탈 털어 널어놓던 날 밀짚 잘라다 비누 거품 불며 둥둥 날아다니던 날 앞뒷산도 버글버글 거품이 일어 저 어디 다른 데나 가볼까 몸 부풀리며 일어서던 날..

장대 들고 따라와 /송진권

장대 들고 따라와 송진권 장대를 든 아이가 담장을 긁으며 걸어가요 또다른 아이도 집을 뒤져 장대를 찾아들고 따라가요 장대 끝을 둥글게 휘어 거미줄 잔뜩 걷어 붙이고요 까치발 하고 몸을 길게 늘였어요 오늘 하늘은 푸르기만 해서요 구름 한점 없어요 매미 소리만 우렁차게 들려요 우리 할머니가 그러는데요 이렇게 기다란 장대를 높이 들고 가면 장대 끝에 우리를 데려갈 새가 날아와 앉는대요 장대를 높이 든 아이들을 키 작은 아이들이 따라가요 미루나무 길을 따라 마을 밖으로 도랑을 따라 강이 보이는 데까지 ―시집『원근법을 배우는 시간』(창비,, 2022)

처음으로 헤아려 보다 /금별뫼

처음으로 헤아려 보다 금별뫼 침묵이 가장 큰 비명이라고 생각될 때 작은 돌이라도 수면에 큰 파문을 일으킬 때 물 위에다 맹세를 적어놓고 고개를 숙일 때 여러 번 생각하고 한번 말하겠습니다 생각하는 생각 그것이 심연일 때 한 사람의 진실과 바꿀 만한 가치는 없다고 생각될 때 소중한 얘기는 반복해서 들어도 소중할 때 처음으로 빗방울을 헤아려 본 사람을 생각할 때 여러 번 생각하고 한번 말하겠습니다 처음으로 헤아려 보니 구름 걷힌 하늘이 더욱 푸릅니다 ―시집 『묻고 싶은 아침이 있다』(현대시학,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