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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감 /박해성

교감 박해성 장마 걷힌 건널목을 건너오신 노파 1, 쌈지공원 벤치에 앉아 헝겊가방 끌어안고 깨질듯 투명한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왼쪽에서 온 노파 2, 왼쪽에 주저앉는다 아이구야야! 비명조차 유머로 들리는지 신호등 빨간 눈동자 명랑하게 윙크 하는데 꽃무늬 배낭 벗고 가운데 앉는 노파 3, 신호등이 붉으락푸르락 바뀌거나 말거나 1, 2, 3, 텅 빈 허공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시조정신』 (2022, 추동호)

나방은 누가 풀어 놓았을까 /김성신

나방은 누가 풀어 놓았을까 ​​ 김성신​ ​ 예감은 때로 정지신호, 가늘어진 말들이 마른 기침소리를 낸다 침묵은 세상 밖의 노선 선뜻 다가서지 못하고 두리번거릴 때, 아프다고 소리치지 못하고 나를 잠글 때, 벼린 시간이 나뭇등걸에 매달려 있다 부랑자가 뱉은 마른기침을 먹고 공원의 편백은 무심히 자라 반백이 되고 다닥다닥 붙어 가계를 꾸리겠지 음률을 고스란히 옮긴 떨리는 손의 음표들 슬픔 위에서도 가볍게 내려앉아 기꺼이 날아오르려는 눈빛 내딛던 발을 걷은 껍질처럼 공손한 자세로 공벌레들이 웅크려있다 ​ 그늘이 거느리는 길을 묵묵히 따르는 당신 나방을 뒤따르는 한 무리의 침묵 어둠이 흩어지고 남긴 서늘한 빛무리 속으로 울고 남은 몇 개의 말들이 저녁으로 이운다 내가 버린 칼날의 곡哭들은 어디에 기대어 있을까..

돌 속의 바다 /김은상

돌 속의 바다 김은상 나는 누구의 무덤이 되겠습니까. 저녁의 귀밑머리 아래서 파도가 흘러옵니다. 너무나 화창한 밤이어서 죽기 좋은 하이델베르크의 물결입니다. 밤의 눈썹 끝에서 포말로 부서지는 별빛들이 돌의 적막 속에서 출렁입니다. 한 줌의 희망과 한 모금의 기쁨도 없이 마른 생을 살아간다는 건 소리칠 수 없는 비명을 삼키는 일입니다. 날개를 파산한 새들에게 하늘은 관념입니다. 그리하여 나의 연명은 이명입니다. 그리움도 연민도 다 써버린 지 오래인데 비겁하게도 나는 눈사람을 만듭니다. 내 삶의 가장 큰 실패는 시에서 왔지만 시인이 되지 않았더라도 성공적인 인생은 없었을 것입니다. 가여운 하이델베르크의 성벽이 나의 가없는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병든 아버지가 죽고 알게 됐습니다. 내 뜨거웠던 사랑의 원천은 ..

철 이른 꽃이 지다 /이미순

철 이른 꽃이 지다 이미순 오래 살다 보니 기계가 말을 한다 상품이나 비상품은 그 한마디에 달렸다 한라봉 반자동 선별기 6단 7단 삑 소리까지 살아온 무게 따라 사람들은 가는 거다 가위에 찔렸는지 꼭지에 찔렸는지 내 조카 가슴 한쪽도 곰팡이 꽃 피어났지 가지 하나에 꽃 하나 잘도 솎아내더니만 제 맘속 꽃숭어린 왜 보지 못했을까 수취인 수취인 부재 오늘 더 보고 싶다 ―『시와소금』 (2022,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