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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을 쓰며 짖는 개에게 /김명기

악을 쓰며 짖는 개에게 김명기 나도 살자고 한 일이라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어디 갈 곳이라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돌아갈 수는 없다 기억하는 것을 지우고 숙명이란 말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관계는 참 비통하지 버리고 돌아선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어디선가 속죄를 대신할 사람이 너를 찾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벽에 머리를 찧으며 끊임없이 왜냐고 묻고 있지만 대답해줄 수가 없다 공손한 너를 데리고 저녁 한때를 걸어가던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오직 오늘만은 살아야겠다고 발버둥치는 우리는 같은 족속일지도 모른다 어느 편에도 서지 못하는 아나키처럼 서로의 슬픔을 막아서는 중이다 더 이상 맨발인 너를 위해 해줄 게 없구나 곧 체념이 친구처럼 옆에 와 누울 것이다 쏟아붓는 기원과 비통은 회랑으로 흩어질 ..

부부 수선공 /정상미

부부 수선공 정상미 말고삐 놓아버린 엄마를 수선한다 툭하면 말의 태엽 풀려버린 엄마를 말들은 혀를 붙잡아 미궁 속에 가둔다 아버지는 목숨 줄 잇는 부동의 나사였다 굵고 큰 두 손으로 그녀를 미당기며 수시로 풀어진 말을 조였다가 풀었다가 아버지 몸에서 나사들이 흘러내렸다 휘청이는 길 위에 비스듬히 선 그에게 엄마는 얇은 손으로 나사를 돌린다 ―『다층』(2022, 가을호)

젓가락 /최태랑

젓가락 최태랑 둘이 있어야 한 벌이 되는 젓가락 식탁 위를 휘젓고 다니는 저 날렵한 것들 누구와 짝이었는지도 잊어버리고 돌아다닌다 한 식당에 있으면서도 제짝을 모르고 산다 인연은 봄비처럼 왔다가 이별은 소나기처럼 간다 우연찮게 만나도 옛 기억을 모른다 수저통에 들어가면 모두가 한통속 둘이 같이 있을 때면 포개져서 울력을 한다 젓가락은 잡는 사람에게만 몸을 내준다 어떤 입에서 쪽쪽 빨리다가 또 다른 사람을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무심하게 입속을 드나든다 처녀 입에 들어갔던 것이 노인의 입속으로 들고 청년 입속에 들고 나던 것이 중년 여인 입속에 든다 일용직 노동자처럼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생을 살다 간다 ―시집『초록 바람』(천년의시작, 2022)

도시의 밤은 슬리퍼를 끌고 /김미연

도시의 밤은 슬리퍼를 끌고 김미연 밤의 발자국이 찍히고 있다 골목을 빠져나간 빛의 그림자도 어둠에 덮이고 구겨진 말들이 도시의 골목에 뿌려진다 칠흑 속으로 하루의 꼬리가 기울고 둥지가 없는 비둘기 떼는 고가다리 아래 부리를 묻고 허기진 밤을 보낸다 막차는 긴 노선을 끌고 사라지고 길을 놓친 자정이 우두커니 정거장에 서 있다 역을 붙잡고 살아가는 불빛들 포장마차 백열등이 푸념 섞인 반쪽의 귀가를 붙잡아 앉힌다 이 도시는 잠들지 못한다 야식을 싣고 질주하는 오토바이는 밤의 맥박 24시 편의점 골목 슬리퍼를 끌고 온 불면이 충혈된 시간을 달래줄 술병 하나를 들고 나간다 절룩거리는 새벽이 그 뒤를 따라간다 거리를 방황하는 저 많은 외박과 가출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담뱃불에 밤의 심장이 타들어간다 ―시집『지금도..

베란다 /김미연

베란다 김미연 사계절 쥐고 있는 슬픔이 무겁다 집 안에서 밀려난 것들 감추고 싶은 은밀한 것들 병든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다 겨울잠을 자고 있는 방치된 것들, 담배연기로 실직을 견디던 사내도 베란다 구석에서 녹슬고 있다 아찔한 바닥을 바라보며 늙어가는 콘크리트 발밑이 벼랑이다 난간을 치고 경계를 짓지만 집은 허공에 떠 있다 유리창 밖, 실내로 들어가지 못해 집이 아닌 집이다 ―시집『지금도 그 이름은 저녁』(미네르바, 2022)

그 여름의 저수지 /김미연

그 여름의 저수지 김미연 그 저수지는 내 사유의 무덤 검은 푸르름 속으로 뛰어내릴 수 있었기에 맥박이 뛰는 것을 확인하던 곳이었다 알 수 없는 열여섯 살의 수심 속으로 뛰어들던 사춘기의 길목에 그 저수지가 있었다 주변을 둘러싼 나무들은 물구나무서서 푸른 머리를 처박고 새떼도 날아와 무단히 몸 던지던 곳 지난밤 실종자도 물밖으로 얼굴을 내밀던 곳 아침이 오면 내 근심의 수위도 높아져서 저물녘까지 나를 붙잡고 있었다 거센 물살이 나를 밀어내고 겨우 사춘기가 지나갔다 절반의 방황을 그곳에 두고 와 아직도 그 절망의 구덩이를 들여다본다 ―시집『지금도 그 이름은 저녁』(미네르바,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