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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 /최태랑

사이 최태랑 그 말 참 좋다 아직 오지도 지나지도 않은 사이에 낀 무렵이란 말 까닭 없이 설레는 시간 떫지도 시지도 않는 그렇다고 단맛이 나는 것도 아닌 견고한 언어는 아니지만 잠깐 헛생각하다 지나쳐 버릴 것 같은 낮과 밤 사이 빗물 고인 돌확에는 벌써 개밥바라기 별이 내려와 있고 산그늘이 홑이불로 마을을 덮는 시간 집을 나갔던 연장들과 가축들이 돌아오는 저물녘 달빛 희미하게 문틈으로 들어와 빈방 벽에 묵화를 치고 있다 ―시집『초록 바람』(천년의시작, 2022)

호박꽃을 다시 보다 /송태준

호박꽃을 다시 보다 송태준 명줄 받은 보과인가, 도시로 온 호박넝쿨 강 나온 돛배처럼 위태위태 흔들거리며 줄광대 외줄을 타듯 철망을 감아 오른다. 돈짝만큼 열린 하늘 여우볕도 고마워 세상을 다 얻은 듯 우쭐대는 모습이란… 버릇 된 신세타령이 은연중 되돌아뵈는, 뙤약볕 밭두렁을 태생으로 퍼질고 앉아 보채 쌓는 바람에도 덩그레 피워 올리던 어머니 가없는 웃음 한세상 뒤 다시 만나, 이목을 구걸하듯 주절주절 피는 그 꽃이 딱 하루 자식농사 뒤 서둘러 접어가는 젊어서 놓친 겸양도 석양에 들어 보누나. ―『시조미학』(2022년 가을호)

노인 /이종곤

노인 이종곤 그는 오랫동안 다람쥐였다 이제 입을 위해 쳇바퀴를 돌리지 않는다 그러자 세상이 훈수처럼 들어오고 압박감이 사라진 자리에 허전함이 들어와 느닷없이 심장에 비 오는 날이 많다 무거운 짐을 하역한 바퀴가 순간 팽창하듯 그의 뼈 속으로 조류들처럼 공기주머니가 하나둘 생기는 것도 그 즈음이다 얼굴은 자꾸 하회탈을 닮아 가기도 한다 어쩌면 밤새 날개가 생겨 날아갈지 모른다 공원이나 지하철 매표원에게는 그가 바람이나 투명인간임이 틀림없다 가끔 영화관 매표원에게는 그의 형체가 반쯤 보이기도 한다 점점 ㄱ자를 닮아가는 몸통이 석양의 산책길에 최선을 다해 걸어가서 벚꽃처럼 내려올 때 붉은 노을 닮은 그의 이름이 있다 ―계간『詩하늘 107』(2022년 가을호)

블라디보스톡에서 /이달균

블라디보스톡에서 이달균 배부른 과일의 상처를 닮아 가는 향기로운 나날들을 애써 외면하고 저만치 허기를 앓는, 조금 먼 객지의 밤 옆방에서 누군가 시를 갉아 먹는다 외로움이 즐겁다 너무 오래 굶주리지 않아 보드카 한 잔을 부어 화형식을 거행한다 적당히 온기를 재는 시인의 체온계를 불꽃이여 차갑게, 더 냉정히 응징해 다오 뜨거운 얼음성벽에 유폐된 내 안의 나 ―『정형시학』(2022년 가을호)

어머니와 황태 /이이화

어머니와 황태 이이화 하루를 헐값으로 처분한 아버지가 빈 수레 덜컹이며 돌아오는 저녁 동구 밖까지 마중 나온 어둠이 코 흘리게 아이들과 재잘대며 마을 순찰을 돌았다 처마 밑에서 겨울을 보관하고 있던 황태 한 마리 빈곤한 밥상 위에서 모처럼 환하게 식구들 허기를 구워낸다 어머니 웃음으로 단단하게 세월을 키우던 아이들 하나 둘 꽃을 피우기 위해 봄 찾아 떠난 자리 맛난 속살 다 내어주고 뼈대만 앙상해진 황태 닮은 어머니가 치매를 다독이며 은사시나무처럼 가볍게 아득히 먼 기억들을 뒤척이고 있다 ―계간『詩하늘 107』(2022년 가을호)

철 이른 꽃이 지다 /이미순

철 이른 꽃이 지다 이미순 오래 살다 보니 기계가 말을 한다 상품이나 비상품은 그 한마디에 달렸다 한라봉 반자동 선별기 6단 7단 삑 소리까지 살아온 무게 따라 사람들은 가는 거다 가위에 찔렸는지 꼭지에 찔렸는지 내 조카 가슴 한쪽도 곰팡이 꽃 피어났지 가지 하나에 꽃 하나 잘도 솎아내더니만 제 맘속 꽃숭어린 왜 보지 못했을까 수취인 수취인 부재 오늘 더 보고 싶다 ―『시와소금』(2022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