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 동시조♠감상해 보자 405

기린호텔 /홍현숙

기린호텔 홍현숙 케냐에 가면 기린호텔이 있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지 예약이 항상 꽉꽉 차 있대 내가 만일 그곳에 간다면 가방에 기린이 좋아하는 아카시 잎과 포도를 가득 넣어 갈 거야 점박이 목을 쑤우욱 들이밀며 가방을 긴 혀로 달그락달그락 뒤지고 있을 기린을 상상해 그런 기린호텔 한 번 가 보고 싶어 ㅡ동시집『기린호텔』(2021, 걸음)

달빛 밟기 /조정인

달빛 밟기 조정인 한밤중 잠에서 깼어. 방바닥에 달빛이 소복했어. 손바닥으로 쓸면 뽀얗게 묻어날 것 같았어. 달빛을 덮고 강아지 송이는 곤히 잠들었어. 반 뒤집힌 귀를 가만히 펴주었어. 보라색 가느다란 실핏줄들이 지나가는 귀. 작은 앞발도 쥐어보았어. 달빛이 희게 내린 동그란 이마에 입술도 얹어보았어. 나도 달빛 한 자락 끌어다 덮고 송이 곁에 누워 송이 코고는 소리 듣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어. 강아지 잠 속에도 내 잠 속에도 달빛은 내려 쌓여서 꿈속의 내가 강아지 꿈속으로 놀러갔어. 우리는 포근포근 달빛을 밟았어. 국화꽃무늬 강아지 발자국 내 발자국이 머뭇머뭇 뒤따라왔어. ㅡ『동시마중』(2021, 9-10월호)

등 /이수

등 이수 장맛비 고인 웅덩이에 엎드려 있는 모래주머니의 등을 며칠째 밟고 지나갔어요. 생각해 보면 내가 밟는 건 모래주머니 등만이 아니었어요. 가족의 등 친구의 등 선생님의 등 흙의 등 물의 등 숲의 등‧‧‧‧‧‧. 모래주머니 등을 밟고 흙탕물 건너다녔듯 묵묵히 내준 등 기대어 하루하루 잘 건너왔어요. ㅡ『열린아동문학』(2021, 가을호)

세상에 이런 일이 /신난희을호)

세상에 이런 일이 신난희 우리집 미용실에 하얀 북극곰이 찾아왔어요 아기 공룡 둘리처럼 빙하 타고 왔대요 북극이 더워져서 못살겠다고 하얀 털 다 깎아달래요 부들부들 엄마 손이 떨리고 뭉턱뭉턱 하얀 털이 떨어질 때 또록또록 커다란 눈물방울도 떨어졌어요 지구가 더워져 빙하가 녹고 섬도 사라지는 방송을 본 날 밤 꿈이지만 세상에 이런 일이 정말 생길 것 같아 스위치 하나 내려요 지구 온도 내려요. ㅡ『동시 먹는 달팽이』(2021,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