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삼류가 좋다/김인자 나는 삼류가 좋다 김인자 이제 나는 삼류라는 걸 들켜도 좋을 나이가 되었다. 아니 나는 자진해 손들고 나온 삼류다. 젊은 날 일류를 고집해 온 건 오직 삼류가 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더러는 삼류 하면 인생의 변두리만을 떠올리지만 당치 않는 말씀. 일류를 거쳐 삼류에 이른 사람.. 시를♠읽고 -수필 2015.10.29
해마다 꽃무릇/이규리 해마다 꽃무릇 이규리 저 꽃 이름이 뭐지? 한참 뒤 또 한 번 저 꽃 이름이 뭐지? 물어놓고서 그 대답 듣지 않을 땐 꼭 이름이 궁금했던 건 아닐 것이다 꽃에 홀려서 이름이 멀다 매혹에는 일정량 불운이 있어 당신이 그 앞에서 여러 번 같은 말만 한 것도 다른 생각조차 안 났기 때문일 것이.. 시를♠읽고 -수필 2015.10.08
추석 무렵 /김남주 추석 무렵 김남주 반짝반짝 하늘이 눈을 뜨기 시작하는 초저녁 나는 자식놈을 데불고 고향의 들길을 걷고 있었다. 아빠 아빠 우리는 고추로 쉬하는데 여자들은 엉덩이로 하지? 이제 갓 네 살 먹은 아이가 하는 말을 어이없이 듣고 나서 나는 야릇한 예감이 들어 주위를 한번 쓰윽 훑어보.. 시를♠읽고 -수필 2015.09.23
내가 아버지의 첫사랑이었을 때/천수호 내가 아버지의 첫사랑이었을 때 천수호 아버지는 다섯 딸 중 나를 먼저 지우셨다 아버지께 나는 이름도 못 익힌 산열매 대충 보고 지나칠 때도 있었고 아주 유심히 들여다 볼 때도 있었다 지나칠 때보다 유심히 눌러볼 때 더 붉은 피가 났다 씨가 굵은 열매처럼 허연 고름을 불룩 터뜨리.. 시를♠읽고 -수필 2015.09.15
고래를 기다리며/안도현 고래를 기다리며 안도현 고래를 기다리며 나 장생포 바다에 있었지요 누군가 고래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했지요 설혹 돌아온다고 해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요, 나는 서러워져서 방파제 끝에 앉아 바다만 바라보았지요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기다.. 시를♠읽고 -수필 2015.09.15
그 꽃/고은 그 꽃 고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시집『순간의 꽃』(문학동네, 2001) 몇 년도에 백담사를 갔는지 년도를 기억할 수 없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유배?를 왔다가 풀려나서 돌아간 후였다. 전직 대통령이 유배를 다녀간 후 백담사 올라가는 길이 좋아.. 시를♠읽고 -수필 2015.09.02
쟁반탑 / 복효근 쟁반탑 복효근 탑이 춤추듯 걸어가네 5층탑이네 좁은 시장 골목을 배달 나가는 김씨 아줌마 머리에 얹혀 쟁반이 탑을 이루었네 아슬아슬 무너질 듯 양은 쟁반 옥개석 아래 사리합 같은 스텐 그릇엔 하얀 밥알이 사리로 담겨서 저 아니 석가탑이겠는가 다보탑이겠는가 한 층씩 헐어서 밥.. 시를♠읽고 -수필 2015.08.20
내가 죽거든/크리스티나 로제티 내가 죽거든 크리스티나 로제티 사랑하는 사람아, 내가 죽거든 나를 위해 슬픈 노래 부르지 마셔요. 머리맡에 장미 심어 꽃 피우지 말고 그늘지는 사이프러스도* 심지 말아요. 비를 맞고 이슬에 담뿍 젖어서 다만 푸른 풀만이 자라게 하셔요. 그리고 그대가 원한다면 나를 생각해줘요. 아.. 시를♠읽고 -수필 2015.08.20
임시로 죽은 사람의 묘비명/이창기 임시로 죽은 사람의 묘비명 이창기 그는 태어나면서 임시로 기저귀를 찼다. 그 뒤 임시로 어딘가에 맡겨졌다가 임시 학교를 다녔다. 임시 공휴일에 임시 열차를 타고 임시 일자리를 구했다. 임시 숙소에서 임시반장의 통제를 받으며 임시로 맡겨진 일을 했다. 옷장 하나 없이 물주전자와 .. 시를♠읽고 -수필 2015.08.13
자화상 / 박형진 자화상 박형진 마당 앞에 풀이나 뽑느라 아무것도 못 했어 거울 앞에 서면 웬 낯선 사내 오십 넘겼지 아마? ―시집『콩밭에서』(보리, 2011) 자화상은 화가가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이고 시의 자화상 또한 시인 자신의 날것의 고백이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는 외형.. 시를♠읽고 -수필 2015.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