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동백꽃 지다/박숙경 쪽동백꽃 지다 박숙경 온 봄 내 홀딱 벗고도 더 벗을 게 남았는지 산길 경사만큼 목청을 높여가는 검은등뻐꾸기를 나무라는 이름 모를 새의 한 마디 지지배야 지지배야 가산산성 진남문에서 동문 올라가는 길 말귀를 못 알아듣는 척 뒷모습이 더 고운 쪽동백꽃의 하얀 능청 ―시집 『날.. 시를♠읽고 -수필 2017.07.15
뻐꾸기 울던 날/박성규 뻐꾸기 울던 날 박성규 빈집털이 전문가가 동네 근처에 왔단다 제비에게 방 한 칸 세 주는 한이 있더라도 집은 절대 비우지 말아야한다 오죽하면 통장님이 쉰 목소리 가다듬은 방송으로 문단속까지 당부하실까 뻐꾸기가 울면 집을 비우지 말아야 한다 까닭일랑 묻지를 말고 ―시집『이.. 시를♠읽고 -수필 2017.07.06
자화상/박형진 자화상 박형진 마당 앞에 풀이나 뽑느라 아무것도 못 했어 거울 앞에 서면 웬 낯선 사내 오십 넘겼지 아마? ―시집『콩밭에서』(보리, 2011) --------------------------------------------- ‘자화상‘ 제목으로 쓰여진 시가 참으로 많다. 이미란, 정희성, 박두진. 박용래, 한하운, 이수익, 김초혜, 고은, .. 시를♠읽고 -수필 2017.07.06
짓는다는 것 ―치매행致梅行 · 158/홍해리 짓는다는 것 ―치매행致梅行 · 158 홍해리 반달 하나 하늘가에 심어 놓고 눈을 감은 채 바라다봅니다 먼 영원을 돌아 달이 다 익어 굴러갈 때가 되면 옷 짓고 밥 짓고 집 지어 네 마음 두루두루 가득하거라 내 눈물 지어 네 연못에 가득 차면 물길을 내 흘러가게 하리라 사랑이란 눈물로 .. 시를♠읽고 -수필 2017.07.05
희망/정희성 희망 정희성 그 별은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 별은 어둠속에서 조용히 자기를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의 눈에나 모습을 드러낸다. ―시집『돌아다보면 문득』(창비, 2008) 그리스 사람들은 신화 속에 신을 사람과 동일시했다고 한다. 신들도 사람과 같이 사랑을 하고 분노를 하고.. 시를♠읽고 -수필 2017.07.04
나비족/홍일표 나비족 홍일표 해변에서 생몰연대를 알 수 없는 나비를 주웠다 지구 밖 어느 행성에서 날아온 쓸쓸한 연애의 화석인지 나비는 날개를 접고 물결무늬로 숨쉬고 있었다 수 세기를 거쳐 진화한 한 잎의 사랑이거나 결별인 것 공중을 날아다녀본 기억을 잊은 듯 나비는 모래 위를 굴러다니고.. 시를♠읽고 -수필 2017.06.29
전봇대/이명숙 전봇대 이명숙 바람은 바람의 길 양보하지 않는다 한소끔 빛을 위해 저리 깊이 우는가 온 몸에 누덕 옷 걸친 제 설움에 우는가 가난도 희망인 양 노래하는 달빛 소리 마두금 대신 우는 유목의 행성인가 일숫돈 장기 삽니다 휘장처럼 두른 허기 덕지덕지 피 칠갑 그 무슨 약속인 양 벌건 대.. 시를♠읽고 -수필 2017.06.24
남해 금산/이성복 남해 금산 이성복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시집『남해 .. 시를♠읽고 -수필 2017.06.13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리며/이승하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리며 이승하 작은 발을 쥐고 발톱 깎아드린다 일흔다섯 해 전에 불었던 된바람은 내 어머니의 첫 울음소리 기억하리라 이웃집에서도 들었다는 뜨거운 울음소리 이 발로 아장아장 걸음마를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이 발로 폴짝폴짝 고무줄놀이를 한 적이 있.. 시를♠읽고 -수필 2017.05.01
난 좌파가 아니다/신현수 난 좌파가 아니다 신현수 비 내리는 날 낡은 유모차에 젖은 종이 박스 두어 장 싣고 가는 노파를 봐도 이제 더 이상 가슴 아프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네온 불 휘황한 신촌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 위 온몸을 고무로 감고 사람의 숲을 뚫고 천천히 헤엄쳐 가는 장애인을 봐도 이제 더 이상 가슴 저리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천일 가까이 한뎃잠을 자며 농성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을 봐도 이제 그 이유조차 궁금하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제초제를 마시고 죽은 농민을 봐도 몸에 불 질러 죽은 농민을 봐도 아무런 마음의 동요가 없으므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난 좌파가 아니다 ―신현수 시선집『나는 좌파가 아니다』(작은숲, 2012) 누가 나에게 정치의 정체성을 물으면 무어라고 해야.. 시를♠읽고 -수필 2016.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