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지운다/허형만 <▲삼각산(북한산) 노적봉> 이름을 지운다 허형만 수첩에서 이름을 지운다 접니다. 안부 한 번 제대로 전하지 못한 전화번호도 함께 지운다 멀면 먼 대로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살아생전 한 번 더 찾아뵈지 못한 죄송한 마음으로 이름을 지운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 시를♠읽고 -수필 2018.12.26
약속/천상병 약속 천상병 한 그루의 나무도 없이 서러운 길 위에서 무엇으로 내가 서 있는가 새로운 길도 아닌 먼 길 이 길은 가도가도 황토길인데 노을과 같이 내일과 같이 필연코 내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다. ―시선집『천상병 전집』(평민사, 2007) 중국에서는 약속 또는 신의의 표상으로 애인을 기.. 시를♠읽고 -수필 2018.11.24
병에게/조지훈 -당뇨애인/신표균 병에게 조지훈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시를♠읽고 -수필 2018.10.15
내 눈을 감기세요 / 김이듬 내 눈을 감기세요 이듬 구청 창작교실이다. 위층은 에어로빅 교실, 뛰고 구르며 춤추는 사람들, 지붕 없는 방에서 눈보라를 맞는다 해도 거꾸로 든 가방을 바로 놓아도 역전은 없겠다. 나는 선생이 앉는 의자에 앉는다. 과제 검사를 하겠어요. 한 명씩 자신이 쓴 시 세 편을 들고 와 내 책.. 시를♠읽고 -수필 2018.09.06
대추 한 알/장석주 대추 한 알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낱 ―시집『붉디 붉은 호랑이』(애지, 2005) (『서울 지하철 시』. 4호선 .. 시를♠읽고 -수필 2018.08.20
운우지정(雲雨之情) /이선이 운우지정(雲雨之情) 이선이 뒤꼍에서 서로의 똥구멍을 핥아주는 개를 보면 개는 개지 싶다가도 이 세상에 아름다운 사랑이란 저리 더러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머물러서는 마음도 미끄러진다 평생 바람처럼 활달하셔서 평지풍파로 일가(一家)를 이루셨지만 그 바람이 몸에 들어서는.. 시를♠읽고 -수필 2018.07.14
바람 속에서 / 정한모 바람 속에서 정한모 1. 내 가슴 위에 바람은 발기발기 찢어진 기폭 어두운 산정에서 하늘 높은 곳에서 비정하게 휘날리다가 절규하다가 지금은 그 남루의 자락으로 땅을 쓸며 경사진 나의 밤을 거슬러 오른다 소리는 창밖을 지나는데 그 허허한 자락은 때묻은 이불이 되어 내 가슴 위에 .. 시를♠읽고 -수필 2018.07.05
새 / 천상병 새 천상병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 알고 모르고 잊.. 시를♠읽고 -수필 2018.06.16
배를 매며 / 배를 밀며 -장석남 배를 매며 장석남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일도 없으면서 넋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 시를♠읽고 -수필 2018.06.09
뻐꾸기 둥지(변주) /김신용 뻐꾸기 둥지(변주) 김신용 뻐꾸기 둥지는, 사람의 귀네 귓속의 달팽이관을 오므려 조그만 둥지를 만들어 주는, 그 둥지에서 태어난 새끼가, 다른 알들은 모두 둥지 바깥으로 떨어트려 버리고는, 끈질기게 울음의 핏줄을 이어주는, 귀네 남의 둥지에 알을 낳고 시침 뚝 떼고 있는 없는, 그 .. 시를♠읽고 -수필 2018.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