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12358

샘물/김달진

샘물/김달진 숲 속의 샘물을 들여다본다 물 속에 하늘이 있고 흰 구름이 떠 가고 바람이 지나가고 조그마한 샘물은 바다같이 넓어진다 나는 조그마한 샘물을 들여다보며 동그란 지구의 섬 우에 앉았다. (『청시』. 청색지사. 1940 :『김달진 시전집』. 문학동네.1997)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10. 03. 29 / 낮 13시 15분

각설탕/유현숙

각설탕/유현숙 봄꽃도 봄빛도 아라리가 났는데 느닷없는 눈이 내리네 각설탕 같은 눈이 내리네 수화기에서 들리는 말은 옛말이고, 옛말처럼 멀고, 각설탕처럼 달고, 시작이 늦지 않겠느냐고 묻는 안토니우스에게 시작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나는 대꾸하네 한때는 물뱀처럼 시이저를 사랑했네 검고 푸른 독을 먹여 뱀을 f길렀네, 뱀에게 물릴 손가락들을 닦아내고 향유로 씻었네 나는 몇 번이나 초록노트에다 이 말들을 베껴보네 말을 베끼는 그 한 계절을 사랑했네, 그 한 계절을 다 기록하지 못했네 2 명지바람 부네 어제부터 앓네 타샤의 정원을 생각하네 냉이풀이 누워있는 내 몸 골짝에 커티지 가든을 개간하고 싶네 이 봄이 처음 오는 계절인가 묻네 전화를 한 사내는 지금도 개찰구에 서 있다 하네, 내가 그의 첫사랑이라고 하네 ..

오다 가다/김억

오다 가다/김억 오다 가다 길에서 만난 이라고 그저 보고 그대로 갈 줄 아는가. 뒷산을 청청(靑靑) 풀 잎사귀 푸르고 앞바단 중중(重重) 흰 거품 밀려든다. 산새는 죄죄 제 흥을 노래하고 바다엔 흰 돛 옛 길을 찾노란다. 자다 깨다 꿈에서 만난 이라고 그만 잊고 그대로 갈 줄 아는가. 십리 포구 산 너먼 그대 사는 곳 송이송이 살구꽃 바람과 논다. 수로(水路) 천리 먼먼 길 왜 온 줄 아나. 예전 놀던 그대를 못 잊어 왔네. 시선집「한국의 명시」김희보 엮음 최남선에서 기형도까지 1005편 총수록 2010. 03.27 / 밤 22시 18분

빗소리/주요한

빗소리/주요한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이즈러진 달이 실낱 같고 별에서도 봄이 흐를 듯이 따뜻한 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이 어둔 밤을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다정한 손님같이 비가 옵니다. 창을 열고 맞으려 하여도 보이지 않게 속삭이며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뜰 위에 창 밖에 지붕에 남모를 기쁜 소식을 나의 가슴에 전하는 비가 옵니다. 시선집「한국의 명시」김희보 엮음 최남선에서 기형도까지 1005편 총수록 2010. 03.27 / 밤 22시 05분

서울로 간다는 소/이광수

서울로 간다는 소/이광수 깎아 세운 듯한 삼방 고개로 누런 소들이 몰리어 오른다 구부러진 두 뿔을 들먹이고 가는 꼬리를 두르면서 간다. 음머 음머 하고 연해 고개를 뒤로 돌릴 때에 발을 헛짚어 무릎을 꿇었다가 무거운 몸을 한 걸음 올리곤 또 음 돌려 음머. 갈모 쓰고 채찍 든 소장사야 산길이 험하여 운다고 마라. 떼어 두고 온 젖먹이 송아지 눈에 아른거려 우는 줄 알라. 삼방 고개 넘어 세포 검불령 길은 끝없이 서울에 닿았네. 사람은 이 길로 다시 올망정 새끼 둔 고산 땅, 소는 못 오네. 안변 고산의 넓은 저 벌은 대대로 네 갈던 옛 터로구나. 멍에의 벗겨진 등의 쓰림은 지고 갈 마지막 값이로구나. 시선집「한국의 명시」김희보 엮음 최남선에서 기형도까지 1005편 총수록 2010. 03.27 / 밤 22..

새/박남수

새/박남수 1 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 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다스한 체온을 나누어 가진다. 2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假飾)하지 않는다. 3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새에 지나지 않는다. -시선집「한국의 명시」김희보 엮음 최남선에서 기형도까지 1005편 총수록

와사등(瓦斯燈)/김광균

와사등(瓦斯燈)/김광균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여름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승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체 사념 벙어리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니고 왔기에 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와사등』. 남만서방. 1939. 『김광균 전집』. 국학자료원. 2002)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10. 03.27 / 오후 15시 31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