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12358

고물장수 19-어머이/김창제

고물장수 19-어머이/김창제 살아생전 우리 어머이는 나만 보면 야단이시네 '야 이놈의 자식아, 배운 놈이 고물장수가 뭐꼬' 높은 벼슬은 못해도 민서기는 해야지. 니 얘비얘미 못 배운 게 한인데 이기 뭐꼬. 입을 꺼 안입고 묵을 꺼 안묵고 보리 미상해 니이 키와 날품 팔아 공부시키논께 까장고물쟁이가. 단디 알아 듣거라. 사람 사는 거 돈이 전부 아이다. 우찌 살머 삼시시끼 입에 풀칠 못할까이. 핀한 백성으로 사람답게 살아야지. 만날 손톱 밑에 기름때 찌고 불구멍 난 옷 입고, 그래 살아 뭐 할끼고. 니꼬다이 매고 바지가랭이 주름잡고 그래 살아도 짧은 인생인데 너거 아들 커서도 지 얘비 고물쟁이 한다 칼래. '나 지금도 변함없이 고물장수라요. 이 세상 참 힘들지만 한번 배운 직업이라 잘 못 바꿔요. 어머이 ..

봄비/변영로

봄비/변영로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기쁜 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어렴풋이 나는 지난날의 회상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랑 안에 자지러지노나! 아, 찔림 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실 같은 봄비만이 소리도 없이 근심같이 내리누나! 아,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시선집 『한국의 명시』김희보 엮음 2010. 03.29 / ..

첫날밤/오상순

첫날밤/오상순 어어 밤은 깊어 화촉동방의 촛불은 꺼졌다. 허영의 의상은 그림자마저 사라지고……. 그 청춘의 알몸이 깊은 어둠 바다 속에서 어족(魚族)인 양 노니는데 홀연 그윽히 들리는 소리 있어. 아아……야! 태조 생명의 비밀 터지는 소리 한 생명 무궁한 생명으로 통하는 소리 열반(涅槃)의 문 열리는 소리 오오 구원의 성모 현빈(玄牝)이여! 머언 하늘의 뭇 성좌는 이 밤을 위하여 새로 빛날진저! 밤은 새벽을 배(孕胎)고 침침히 깊어 간다. 이 시의 '첫날밤'은 속세 인간사의 남녀 관계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열반의 문 열리는 소리"라는 구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를 종교의 경지에까지 승화시키고 있다. 시상이 집결된 대목은 "아야 ……야!"로서 태초 생명의 비밀이 터지는 소리 임을 강조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