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저녁의 말 / 장석남 가을 저녁의 말 장석남 나뭇잎은 물든다 나뭇잎은 왜 떨어질까? 군불 때며 돌아보니 제 집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꾸물대는 닭들 욱박질린 달이여 달이 떠서 어느 집을 쳐부수는 것을 보았다 주소를 적어 접시에 담아 선반에 올려놓고 불을 때고 등을 지지고 배를 지지고 걸게 혼잣.. <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내가 훔치고 싶은 ♠ 시 2014.05.01
은방울꽃 / 김종기 은방울꽃 김종기 넓은 잎 두어 장이 길쭉이 열린 사이로 연초록 줄기마다 총총히 조롱조롱 그 이름 종소리보다 섬세하게 울린다 누군가 그리워서 풀숲에 앉았다가 내 정신 아득하도록 너만을 사랑하리 지순한 향기 찰박거리는 오월 첫날의 내 행운 ㅡ격월간『유심』(2002년 5-6월호) <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내가 훔치고 싶은 ♠ 시 2014.04.09
빈 절 한 채 내 사랑 / 이지엽 빈 절 한 채 내 사랑 이지엽 꽃이 지네 꽃이 지네, 소리도 없이 지네 사람이 그리운 날의 빈 절 한 채 내 사랑 종소리, 그 견디는 赤身과 눈물 사이 지고 있네 지는 꽃 가만히 덮고 중얼거리는 노을 빛 우지 마라 눈부신 침묵의 한때 우지 마라 꽃 그늘 환하고 서늘한 자리 소슬바람 고이고 .. <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내가 훔치고 싶은 ♠ 시 2014.04.09
나희덕 - 뿌리에게/뿌리로부터 뿌리에게 나희덕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먼 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눈.. <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내가 훔치고 싶은 ♠ 시 2014.03.29
너와집 / 박미산 너와집 박미산 갈비뼈가 하나씩 부서져 내리네요 아침마다 바삭해진 창틀을 만져보아요 지난 계절보다 쇄골 뼈가 툭 불거졌네요 어느 새 처마 끝에 빈틈이 생기기 시작했나 봐요 칠만삼천 일을 기다리고 나서야 내 몸속에 살갑게 뿌리 내렸지요, 당신은 문풍지 사이로 흘러나오던 따뜻.. <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내가 훔치고 싶은 ♠ 시 2014.02.12
물푸레 동면기 / 이여원 물푸레 동면기 이여원 물푸레나무 찰랑거리듯 비스듬히 서 있다 양손에 실타래를 감고 다시 물소리로 풀고 있다 얼음 언 물에 들어 겨울을 나는 물푸레 생각에 잠긴 척 바위 밑 씨앗들이 졸졸 여물어가는 소리를 듣고 있다 얼룩무늬 수피가 물에 닿으면 물은 파랗게 불을 켰었다 바람은 .. <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내가 훔치고 싶은 ♠ 시 2014.01.25
빈 손의 기억 / 강인한 빈 손의 기억 강인한 내가 가만히 손에 집어 든 이 돌을 낳은 것은 강물이었으리 둥글고 납작한 이 돌에서 어떤 마음이 읽힌다 견고한 어둠 속에서 파닥거리는 알 수 없는 비상의 힘을 나는 느낀다 내 손 안에서 숨쉬는 알 둥우리에서 막 꺼낸 피 묻은 달걀처럼 이 속에서 눈 뜨는 보석 같.. <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내가 훔치고 싶은 ♠ 시 2014.01.25
질경이의 꿈 / 임경묵 질경이의 꿈 임경묵 질경이도 꽃을 피우냐고요 바람이 구름을 딛고 하루에도 수천 번씩 오르락내리락하는 소백산 정상에서 꽃 안 피우고 살아남는 게 어디 있나요 노루오줌도 찰랑찰랑 지린 꽃을 피우고 심지어 개불알꽃까지 질세라 덜렁덜렁 망태를 흔드는데요 사실 말이지 그렇게 아.. <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내가 훔치고 싶은 ♠ 시 2013.12.07
긍정적인 밥 / 함민복 긍정적인 밥 함민복 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 <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내가 훔치고 싶은 ♠ 시 2013.11.27
석류 / 조운 석류 조운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조운 시조집』.남풍. 1990)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내가 훔치고 싶은 ♠ 시 2013.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