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 4322

능쪽과 능지 - 마당 한구석 그나마 햇빛이 들지 않는

능쪽과 능지 - 마당 한구석 그나마 햇빛이 들지 않는 {능쪽에} 병풍을 치고 시신을 모셔두었는데 열한시도 되지 않아 마당은 다글다글 햇빛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하성란(2008): 그 여름의 수사》 (남한) - 요새 더 {능지의} 오물통에서 썩으며 돋는 곰팡이처럼 때도 장소도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광고장들이였다. 《리복은(1986): 암운》 (북한) ‘능쪽’은 ‘햇빛이 들지 않는 쪽’을 나타내는 방언이다. 표준어 ‘음지쪽’에 해당하는 말이다. ‘능지(-地)’는 ‘볕이 잘 들지 않는 그늘진 곳’을 가리키는 말로, 표준어 ‘음지(陰地)’와 같다. 아래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양달쪽과 양지쪽’과 ‘응달쪽과 음지쪽’은 표준어와 문화어가 다르지 않다. 그런데 ‘능쪽’과 ‘능지’는 남한에서는 표준어가 아니지만 북..

해바라기 -이명숙/조선의

해바라기 이우디 처음 본 순간 울고 싶어서 입술 붉은 장미와 꽃결 보드란 패랭이와 캐모마일 향에 취한, 집시를 꿈꾸는 여름밤의 맨살 깊숙이 파고들어 꽃물 도는 한 마디에 한 목숨 걸고 싶어서 너를 태우고 나를 태우고 중심을 읽는다 빈 칸칸 너를 쓴다 ㅡ시집『수식은 잊어요』(황금알, 2020) -------------------- 해바라기 조선의 산다는 것이 결국 살아남는 것임을 알았을 때 얼굴에서 굳은 표정이 하나씩 없어져도 자구만 달아나는 웃음만은 잡아두려고 애를 태웠습니다 하루에 서너 개씩 시나브로 얼굴에서 표정이 빠진다고 생각해보세요 당신 모습이 핏기없는 무표정이라면 진저리치고 싶을 거에요 삶이 얼마나 무미건조하겠어요 어느 누가 손 내밀어 주겠습니까 하소연할 곳도 없지요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웃음만..

제9회 <시와표현> 신인상 수상작 / 견인(牽引)외 4편 / 강선주

견인(牽引)외 4편 강선주 고장 난 차를 봄의 갓길에 세워두고 견인차를 불렀다 번지수를 물었으나 나는 갓 피어난 산수유나무 옆이라고 말했다 겨울동안 세척이 끝난 태양이 햇살의 도움을 받고도 차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수화기 너머에서 산수유를 찾는 목소리가 들리고 해마다 같은 나무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찾아오는 꽃들을 생각했다 어떤 한계점에서 달리지 않겠다는 차와 무수한 꽃송이의 점화를 일삼는 산수유 잠시 처지를 바꾼 죽은 것과 산 것으로 봄은 천지에 굉음이 일 것 같다 한 생을 단 한 가지 나무로 사는 것이 지루하지 않을까 다른 꽃을 피워보고 싶다는 의지도 없이 오로지 한 가지 꽃에 이름을 걸고 그 이름을 찾아 우리는 그곳으로 간다 ​ 나른한 아지랑이를 뚫고 견인차가 도착하고 달리겠다고 하는 것..

단시조 미학의 새로운 모색과 전망/황치복

단시조 미학의 새로운 모색과 전망 황치복 단시조 미학의 특징과 변형 최근 들어 단시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고, 실제로 단시조집의 발간을 비롯한 다양한 결과들이 산출되고 있다. 단시조에 대한 관심은 시조의 본령을 성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모습으로 생각되며, 시조의 구조적 완결성에 대해 관심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국면으로 판단된다. 단시조애 대한 시조시인들의 관심은 전통적 시조의 간결하고 담백한 미의식을 되돌아보고, 긴장과 압축을 통해서 시적 정조를 갈무리하고자 했던 시조 양식의 본원적 정신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 현상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찍이 가람은 1942년에 「시조는 혁신하자」는 글을 통해서 연시조의 창작을 권유한 바 있다. “연작을 쓰자”는 제목으로 시..

호박 시 모음 -나근희/이은/송찬호/김광규/복효근/유순예/유승도/안상학...외

호박죽을 쑤며 나근희 잘했다 썩을 놈 시골에서 올라온 엄마가 두고 간 늙은 호박 방구석에 틀어박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다가 뒤늦은 엄마의 전화를 받고서야 배를 가른다 숟가락으로 속을 파내어 호박죽을 끓인다 부글부글 잘도 끓는다 엄마 속이 썩어문드러지는 소리 같다 ―시집『즐..

화양연화 시 -류시화/조윤희/김사인/김인구/

화양연화 류시화 나는 너의 이마를 사랑했지 새들이 탐내는 이마 이제 막 태어난 돌 같은 이마 언젠가 한 번은 내 이마였던 것 같은 이마 가끔 고독에 잠기는 이마 불을 끄면 소멸하는 이마 스물두 살의 봄이었지 새들의 비밀 속에 내가 너를 찾아낸 것은 책을 쌓아 놓으면 둘이 누울 공간..

나비 시 모음 -윤곤강/김기림/정한모/복효근/김용택/이진영/김사인/

나비 윤곤강 비바람 험살궂게 거쳐 간 추녀 밑 날개 찢어진 늙은 노랑나비가 맨드라미 대가리를 물고 가슴을 앓는다. 찢긴 나래에 맧이 풀려 그리운 꽃밭을 찾아갈 수 없는 슬픔에 물고 있는 맨드라미조차 소태 맛이다. 자랑스러울손 화려한 춤 재주도 한 옛날의 꿈조각처럼 흐리어 늙은 ..

시조(時調)의 양태(樣態) /유준호

시조(時調)의 양태(樣態) 유준호 • 들어가기 시조의 시원(始元)은 고려조 훨씬 전이지만 실제 등장 발단한 시기는 고려 말기이고, 조선시대에는 이 시조에 무반주로 가락을 붙여 여유로운 노래로 불렀는데 이를 '시조창'이라고 하며 시조창 한 가지를 알아두면 다른 평시조에는 모두 응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