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 4322

도종환 -막차/풍경/나무에 기대어/못난 꽃 ―박영근에게

막차 도종환 오늘도 막차처럼 돌아온다 희미한 불빛으로 발등을 밝히며 돌아온다 내 안에도 기울어진 등받이에 몸 기댄 채 지친 속도에 몸 맡긴 이와 달아올랐던 얼굴 차창에 식히며 가만히 호흡을 가다듬는 이 하나 내 안에도 눈꺼풀은 한없이 허물어지는데 가끔씩 눈 들어 어두운 창밖을 응시하는 승객 몇이 함께 실려 돌아온다 오늘도 많이 덜컹거렸다 급제동을 걸어 충돌을 피한 골목도 있었고 아슬아슬하게 넘어온 시간도 있었다 그 하루치의 아슬아슬함 위로 초가을바람이 분다 ----------- 풍경 도종환 이름 없는 언덕에 기대어 한 세월 살았네 한 해에 절반쯤은 황량한 풍경과 살았네 꽃은 왔다가 순식간에 가버리고 특별할 게 없는 날이 오래 곁에 있었네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풍경을 견딜 수 있었을까 특별하지..

최한나의 맛있는 시 (248) // 꽃아, 가자 / 김점용

시집『나 혼자 남아 먼 사랑을 하였네』펴낸 김점용 시인 사진 / 김점용 시인 꽃아, 가자 김점용 꽃아, 가자 네 온 곳으로 검은 부르카를 쓰고 아무도 몰래 왔듯 그렇게 가자 검은 우물 속이었을까 밤새 울던 풍경 먼 종소리 그 아래였나 푸른 별을 타고 색 묻지 않은 별빛을 타고 돌면서 삼천대계를 돌면서 꽃아, 가자 혼자 싸우듯 아무도 부르지 말고 아무도 몰래 네 온 자리 색 입지 않은 곳 별 뜨지 않은 곳 가자, 꽃아 - 김점용 시집 『나 혼자 남아 먼 사랑을 하였네』중에서 ----------- 지난했던 2020년 한 해, 어쩌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던 한 해의 뒷모습이 애처롭다. 이런 마음은 나만의 것은 아닐 터, 지금 나는 무언가 혁명적 치유가 필요한 지점에 서있다. 진정 떠나고 싶고 떠나야 한다. 지금..

모든 끝은 시작이다 /홍성란

모든 끝은 시작이다 홍성란 난 원래 이른바 자유시가 전공이고 그것도 아는 분은 알겠지만 난해한 시를 썼고 최근에는 시인지 일기인지 모르는 시를 발표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자유시를 그야말로 자유롭게 쓰고 다소 개판을 치는 입장이다. 그런데 전통적인 정형시인 시조에 관심을 두다니? 이상한 일이 아닌가? 세상일은 알 수 없다더니 내가 그 꼴이다. 아무튼 ①최근에 나는 잡지에 발표되는 자유시는 거의 읽지 못하는 상태이고 그건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최근에 발표되는 시들이, 특히 젊은 시인들의 시가 소통이 안 되고 너무 수다스럽고 문맥이 안 통해서 나 같은 시인은 도무지 읽을 힘도 없고 재미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 시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이런 혼란, 무질서, 사설, 넋두리, 수다가 지겹기 때문..

현대시의 혼돈과 시조의 항심(恒心) / 이경철

현대시의 혼돈과 시조의 항심(恒心) / 이경철 진정성과 오리지널리티에 목마른 문화 ‘전망 없는 정체와 혼돈이 우리 시단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감싸고 있다.’ 금세기 들어서면서, 아니 지난 세기 말부터 우리 시단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의 단적 표현이다. 많은 시인과 독자들이 유령같이 떠도는 그런 매캐한 분위기에 답답해하다가 드디어 말문을 터뜨리고 있다. 최근 오세영, 조정권, 이하석, 최동호 등 중진 시인들이 잇달아 시집을 펴내며 시단에 대한 우려와 각오를 비장하게 밝히고 있다. 최동호 시인은 장황하고 난삽하며 소통 부재의 시들이 갖는 몽환적 속박에서 벗어나 서정시 본연의 길을 찾자며 이 시인들의 ‘서정시학 서정시 선집’을 기획했다. 오세영 시인은 “나는 시의 영원성과 감동을 추구하는 사람이다.”라며 우리 시..

2012년 신춘문예 시조 총평 /이봉수

2012년 신춘문예 시조 총평 이 봉 수 (시조시인, 문학평론가) 이제 현대시조는 자유시의 흉내 내기와 고시조 개념의 두꺼운 탈을 벗고 정격시조의 시대를 열어 가고 있다. 2012년 주요 일간지의 신춘문예 시조는 3가지 면에서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첫째, 고시조개념의 시조 범주에 속해 있던 사설시조나 엇시조는 신춘문예 광장에서 멀리 퇴장하고 평시조만 현대시조로서의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평시조 정형으로 한국형 현대정형시를 만들고 굳혀 나갈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둘째, 2수 이상의 연시조가 신춘문예의 주를 이루며 표현의 범위를 넓히고 대다수 연시조는 수의 구별이 뚜렷하고 3장 6구가 반듯하다. 아직도 자유시를 흉내 내어 수의 구별을 없애고 심한 파형을 한 경우가 없지 않으나 매년 조금씩 개..

현대시조의 당면 과제에 대한 제언 /이정자

현대시조의 당면 과제에 대한 제언 1. 시조는 우리 고유의 자랑스러운 정형시이다. 이는 소리글자인 한글이란 훌륭한 그릇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표기할 우리의 그릇이 없을 때는 한자에 그 뜻을 옮겨서 담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 그릇에 담겨진 형태와 노랫말이 달랐다. 한글에 담겨지면서 언문일치의 온전한 형태가 나타났다. 시조는 3장6구 12음보 45자(43-47)로 이루어진 온전한 정형시를 정격으로 간주한다. 이는 시조부흥 운동기에 이병기와 이은상 등이 발표한 시조형식의 변화를 모색하는 여러 유형에 접하면서 조윤제가 학자적 입장에서 이를 조율하여 발표한 것이 현대시조의 모형이 되었다. 이는 중등학교 교과서와 참고서에 실려 있고, 대학교재를 포함한 시조이론서에 실려 있다. 그래서 오늘날 이를 정격으로 간주한..

말과 글이 같아야 한다/이봉수

말과 글이 같아야 한다. 이 봉 수 (시조시인, 문학평론가) 시조를 쓰는 시조시인은 물론 심사위원, 평론가, 교수, 등단희망자 및 학생에 이르기까지 “시조는 정형시”라고 한다. “시조는 정말 정형시인가?” 극히 상식적이고 확실한 것을 새삼스럽게 다시 묻는다. 왜? 많은 시조인들이 말은 바로 하면서 글은 비뚤게 쓰기 때문이다. 입으로는 “시조는 3.4조를 기본음보로 하는 3장 6구 12음보의 정형시”라고 하면서 손으로는 기본음보율을 무시하거나, 3장 6구 12음보를 파괴하거나, 수의 구별을 없애거나, 자유시의 흉내를 내는 등 일일이 지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정형시를 쓴다. 말(주장)과 글(작품)이 다르다. 원로, 중견시인일수록 더 심하다. 이들은 시조는 정형시이지만 자수에 관계없이 표현이 자유로워야 한다느..

별일 없었니껴? /이선영

별일 없었니껴? 이선영 사투리는 사투리가 아니다 그 산천이 낳은 그 땅의 소리다 탯줄 타고 들려오던 나지막한 어미 당부로 제 몸에 새긴 빗살 문신이라 어색치 않은 오가는 발걸음 무던한 촉수에 가끔씩 귀가 쏠릴 때 웃음 만발한 얼굴들이 언뜻 스치고 조여 맨 객지 허리끈 느슨하게 풀 수 없던 표준어의 교편 강 건너 이제는 풀려 가는 헐렁함에 다시 살아나는가 뼛속까지 새겨진 내 사투리는 사투리가 아니다 그리움으로 편하게 단박 안기는 걸 보면 그간 별일 없었니껴? ―계간『詩하늘/통권 100호 특집호』(2020년 겨울호) 말이라는 것은 사람 이름처럼 세상에 없는 사물이 생기면서 이름을 얻어 새로운 말들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시대의 생활상에 따라 버스표 토큰처럼 일시적으로 생성되었다가 쓰임이 다하면 소멸하..

빙하기 /박성현

빙하기 박성현 당신 두 눈에 서려 있는 얼음이, 먼 하늘로 스며들다 지쳐 우두커니 서 있는 노을 같았습니다 마음만 움켜쥐고 얼어버린 거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살얼음 졌으니 오늘만큼은 물러설 곳이 생긴 거겠지요 그렁그렁 남은 햇살을 손바닥으로 쓸어 모으고 가루약을 털어 넣듯 삼켰습니다 팔다리에도 얼음이 끼어 있을까요 당신은 자주 갸릉거렸습니다 밤새 뒤채면서 뜬눈으로 새웠습니다 매일 엄마의 먼 곳이 그리워 울다가, 울음까지 내려놓기는 서러워 마음만 얼렸던 걸까요 얼어붙은 마음이 며칠이고 몇 달이고 계속되는 밤이었습니다 불투명한 얼음도 당신 것, 그러니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 그 두껍고 어두운 곳에서 당신을 녹일 햇살의 울음을 기다려야겠습니다 ―시집『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문학수첩)